감정위원들이 들려주는 ‘문화재 바로 읽기’
입력 2010-10-14 17:35
공항이나 항만에서 ‘문화재 수비대’로 활약하는 문화재 감정위원 20명이 공동으로 책을 펴냈다. 우리 문화재의 해외 반출을 막는 출입국 현장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회화와 도자기, 석상은 물론 고문서나 민속 유물 등 다양한 문화재를 폭넓고 깊이 있게 아우르고 있다.
책에는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방법과 목숨을 걸고 위작을 고발하는 감정 이야기는 물론 고미술품 수집가들의 탐욕까지도 들춰낸다. 여기에 문화재를 발굴하고 해석하는 데 얽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등이 160여장의 생생한 유물 사진과 함께 실렸다.
문화재 감정위원들은 문화재를 바르게 보거나 읽는 법부터 알려준다. 이순미 위원(김포국제공항 근무)은 ‘너는 비록 미물이지만 고상하고 맑아’ 편에서 옛 예술가들이 매미를 통해 표현하려 했던 아름다움을 자세히 들려준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매미 그림이라면 겸재 정선이 그린 ‘송림한선도’를 꼽을 수 있다. 군자의 지조를 상징하는 솔가지를 대각선으로 배치하고 그 위에 앉은 매미만을 크게 부각하였다. 특히 이 그림에서 돋보이는 것은 화가의 뛰어난 관찰력이다. 매미의 다리나 눈동자는 물론 커다란 투명 날개 안의 작은 날개까지 상세히 그렸다. 주제를 제외하고 비워 둔 화면과 솔잎 등에 가해진 담채는 시원함을 전해준다. 그림으로는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내면 깊숙이 선비로서의 포부를 간직했던 정선 자신의 마음을 매미에 의탁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31쪽)
최경현 위원(인천국제공항)은 ‘벽오사의 새로운 근대적 화풍, 어째서 스러졌을까?’라는 글에서 19세기 중반 벽오사의 동인들이 남긴 근대적 감각의 회화를 소개했다. 최 위원은 우봉 조희룡(1789∼1866)의 ‘매화서옥도’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당시에는 남종화풍의 사의적 문인화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매화서옥도’의 출현은 돌연변이, 이단아나 다름없었다. 화면에 드러난 독특한 조형성은 조희룡의 완숙한 예술 인식의 발로임에 틀림없다. 화면 하단에는 사색에 잠긴 문사가 보이는 포옥을 매화나무가 둘러싸고 있으며, 상단에는 눈 덮인 주산이 그려져 있다. 경물(景物) 구성은 서옥도의 일종이지만, 하단의 매화나무와 주산 정상부에 보이는 격정적 필법은 화면에 한껏 생동감을 불어넣으며 보는 이의 시선을 멈추게 한다.”(63쪽)
옛사람들의 삶과 정취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은 더 있다. 세종의 장녀 정소공주의 묘에서 출토된 태항아리와 ‘세종실록’ 기사를 통해 13살의 어린 딸 정소공주를 먼저 보낸 젊은 아비 세종의 절절한 마음을 헤아려보고(‘아비 이도의 슬픔을 기리다’ 편), 이끼꽃이 드문드문 핀 해묵은 올렛담을 끼고 돌아드는 올레를 찾아보기를 권하는 내용에서는 허벅을 등에 지고 다니는 제주 여인네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허벅의 생수로 영혼의 갈증을 풀다’ 편).
문화재 위작에 대한 글은 읽는 재미를 더한다. 김상엽 위원(인천국제공항)은 일제강점기의 경매 도록을 접한 이후 10년간 계속되던 안견의 위작 논란에 마침표를 찍는 긴박한 경험담을 실감나게 소개한다.
“이모씨 등이 안견의 작품으로 주장하는 ‘청산백운도’는 위창문고 경매도록에 실린 조맹부의 ‘고사환금’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비록 오래된 사진이라 다소 흐릿하지만 같은 그림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165∼166쪽)
문화재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 진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세태를 비판한 글도 눈에 띈다. 김현권 위원(인천항국제여객터미널)은 전남 강진 소재 백련사의 현판에 적힌 ‘백련사 만덕산(白蓮社 萬德山)’이 통일신라시대 김생(711∼791)의 필적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소개하고 감식과 애호를 혼동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김성한 위원(평택항국제여객터미널)은 갈수록 치밀해지는 위조수법을 고발하고 ‘감정(鑑定)이 감정(憾情)을 낳는다’는 악설이 통할 수밖에 없는 세태를 고발했다.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엄청난 양의 송·원 시기 자기들이 발굴된 이후 새로운 위조 수법이 등장했다. 위조 전문가들은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도자기와 비슷한 것들로 골라 표면에 패류의 핵을 심어 한두 해 양식한 뒤 건져내는 수법을 썼다.”(176쪽)
어부 최씨의 그물에서부터 시작돼 형사의 탐문 수사와 도굴범 검거를 계기로 침몰선의 존재가 확인되기까지 신안 해저 유물의 발굴과정(‘세기의 발굴 드라마, 그 시작은?’)은 드라마틱하다. 또 사용처를 알 수 없는 발굴 유물의 용도에 대한 고민(‘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등 문화재 발굴과 해석에 얽힌 흥미진진한 뒷 얘기를 풀어 놓는다.
문화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전문가들의 기쁨과 아쉬움, 때로는 설레고 떨리기조차 하는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