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 통해 다시 보는 서울의 모습
입력 2010-10-14 17:36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임석재/인물과사상사
흔히 서울을 일컬어 ‘특색이 없는 도시’라고 한다. 수도가 된 지 600여년, 그 이전까지를 합하면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도시인데 ‘특색이 없다’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전쟁과 개발로 옛 모습을 많이 잃긴 했지만, 약탈의 흔적과 무분별한 산업화까지를 서울의 색깔이라 본다면 우리가 반추할 건 아직 꽤 있을 것이다.
이화여대 건축학부 임석재 교수(49)가 역사적·정치적·건축사적 의의를 지닌 서울 안 건물 312채를 다룬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인물과사상사)를 냈다.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생각 없이 지나치고, 외려 알아보려 하지 않은 서울의 이야기가 거리거리에서 뛰쳐나와 스며든다. 1권에선 사대문 안 구도심을, 2권에선 강남을 비롯한 구도심 밖의 건축들을 다룬다.
이 책은 최근 몰아쳤던 ‘서울학 열풍’의 맥을 잇고 있다. 전근대와 근대 이후를 막론하고 특기할 만한 건축물들의 미학적·역사적 가치를 건축사학자의 관점에서 자세히 소개했다. 서울을 처음 찾은 외국인, 혹은 타향 사람에게 ‘서울에 딱히 갈 만한 곳은 없다’고 말해왔다면 이 책을 정독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직접 찍은 800여장의 사진도 함께 실린 데다 지도까지 상세하다.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가옥은 현재까지 옛 모습을 간직한 서울의 대표적인 고택이다. 원래는 양반의 집이었던 것을 고종이 사서 영혜옹주(철종의 딸)의 남편 박영효에게 하사했다. 그 후 주인이 바뀌었다가 윤 전 대통령의 선친이 사들여 현재에 이른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이 탄생했던 정치의 산실이었으며, ‘동교동’과 ‘상도동’이 그렇듯 ‘안국동’을 한때 한국 현대사의 한 지점을 일컫는 대명사로 만든 집이다. 1400여평의 넓은 부지에 옛 왕실과 현대적 건축기법이 혼재해 있는 건축사적 의미까지 담긴 건물이다.
경복궁·덕수궁 등 처절히 훼손됐다 겨우 복원해가고 있는 옛 궁궐이나 남산골 한옥마을의 순정효황후 친가, 운현궁 등도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서울의 문화재들이다. 지금은 찻집이 된 이태준 고택과 한용운이 말년을 보냈던 심우장도 쓸쓸하게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일은행 건물과 종로 삼성타워 옆에 있는 종각은 또 어떤가. 날카롭게 치솟은 현대와 어설프게 복원된 전통이 공존하는 비현실적인 공간을 우리는 매일 그냥 지나친다. 자취로만 남은 과거가 번화가와 묘하게 어울리는 서울의 한 단면이다. 연세대 이화여대 고려대 등 대학 건물들에서는 인위적으로 심으려 했던 서양식 근대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아름다운 옛 건축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본다.
그렇다고 이 책이 옛날 이야기만 가득 실은 문화재 소개서는 아니다. 현대 한국 건축가들의 교회 건물, 사옥, 상업 건물들도 서울에 있는 것이라면 폭넓게 다뤘다. 도심에 있는 서울중앙우체국은 비행기를 피해 옆으로 갈라지는 건물을 보여주는 9·11 테러 패러디를 참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대학로 문화공간과 인사동 쌈짓길, 이화여대 ECC나 상암동에 최근 지어진 오피스 건물들도 실려 있다. 신촌·여의도·강남·강서 할 것 없이 못 보고 지나쳤던 것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임 교수는 “건축은 예술이고 문화이며 여행이고 역사”라고 말한다. 지어진 것, 파괴된 것, 헐린 것, 보존되는 것 모두에 있어서 시대의 국력과 사상과 경향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 책은 처음 나타날 때는 신기해했던 것들도 세월이 가고 늘 있는 것이 되면 무덤덤해지는 우리의 모습까지 되돌아보게 한다. 소설가 이상이 자주 언급했던 근대의 전시장 미쓰코시 백화점(현 서울 충무로1가 신세계백화점 본점)이나 그 옆 한국은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시민들의 무심함이야말로 시간을 덧입은 서울의 한 단면이 아닐는지. 그러다 사라져버리는 것들에 덧없이 탐닉하는 게 사학자들의 업일지 모른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