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아름다운 교회길(3)-함평읍교회

입력 2010-10-13 17:51


[미션라이프] 청나라 사람 심복의 자서전 ‘부생육기(浮生六記)’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전남 함평읍교회를 찾아가면서 다시 잡은 을유문화사판 부생육기는 15년의 ‘풍화’에 누래져 가고 있었다. 요절한 아내 운을 그리는 심복의 절절한 심정. 헛되고 헛되었을 우리네 삶은 그 어떤 관계도 영원하지 못하다. 사내라면, 슬기롭고 총명한 여자 운의 매력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집을 세우는 지혜로운 여인’(잠 14:1)과 같다. 내게 함평은 지혜로운 여인 운과 같이 각인되어 있다. 함평의 복음화가 지혜로운 어머니 신앙과 같은 한 목회자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다. 현재 함평군은 4만3000여명의 적은 인구임에도 97개 처소, 복음화율 25%를 자랑한다.

읍내 거리에서 보혈빛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순례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지난 주일 읍내 구석구석을 걸으며 예수 시대 성읍 풍경을 떠올렸다. 어디에 눈을 두어도 교회 첨탑이 보였다. 예수 탄생에는 하나님의 모성적 이미지와 부성적 이미지가 함께 있다. 함평은 모성의 이미지며 색으로는 이 지역에 유독 지천인 자운영 보랏빛이다.

그 이미지 중심은 함평읍교회(박광석 목사)다. 처소 하나가 세워짐으로서, 목회자 한 사람이 온유와 지혜로 지역 사회에 헌신함으로서, 생명의 말씀이 이 땅에 뿌리를 굳건히 내린 것이다.

사실 전남 서부의 복음 전파는 이 교회 김병두 목사(1905~2000)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942년 부임한 그는 59년 사임하기까지 목자이자 교육자, 사회사업가, 시민운동가로서 교회를 통한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또 한국전쟁 당시 그 어느 지역보다 빨치산 출몰이 잦았던 지역에서 순교를 무릅쓰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백성을 구해냈다.

그가 부임하던 무렵 일제의 공출과 신사참배의 강요가 성도와 교회를 옥죄었다. 교회 첨탑 종을 대동아전쟁 군수물자로 내주어야 했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에 직면해야 했다. 이를 거부한 김 목사는 징용에 끌려가 6개월간 전남 화순탄광에서 징용살이를 해야했다.

큰 아들 김활용 목사(서울 방배동 이수교회 은퇴목사)는 “징용살이를 할 때 사진을 지금도 내가 갖고 있다”며 “교회에 복귀하셔서 일제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우연히 신문에서 본 일본인 후지모리 부흥사에게 편지를 썼고 그를 부흥집회에 모셔 교회와 성도를 보호하시는 지혜를 보이셨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던 해 9월 유치부를 확대해 유치원을 세우고, 48년엔 지금의 교회 자리에 예배당을 신축했다. 그런 기쁨도 잠깐, 한국전쟁 발발하고 이기섭 노현덕 장로, 박병연 이대수 박갑득 집사 등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좌익에 희생되는 화를 당한다.

문성수(77) 원로장로는 “당시 김 목사님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인민군이 교회를 접수하기 전 어머니 생신이라 해남 집에 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인민군이 교회를 사무실로 써서 교인들이 얼씬도 못했었다”고 증언했다. 김병두 목사는 “죽는 한이 있어도 교회에 가겠다”고 했으나 교인 홍순호(작고·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목사 부친) 윤인식(작고·전 국회의원) 등이 말렸고 한다.

그리고 그해 9월 수복이 되면서 부역자 선별이 시작됐다. 이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돌아온 김 목사는 함무(함평·무안)지방선무공작대 대장을 맡아 빨치산 잔당의 투항을 권유하는 한편 좌·우익 간 피의 보복을 최소화했다. 홍·윤 외에 이원설(작고·전 한남대 총장) 등이 대원이었다.

김 목사에게 신앙훈련을 받은 아동문학가 김철수(60·함평 은광교회 장로)씨는 “김 목사님의 지목에 의해 생사가 결정되던 때에 목사님께선 총칼 앞에 어쩔 수 없이 부역한 그들의 속사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지목하지 않고 끌어 안으셨다”며 “훗날 전남 서부에 10여개 교회를 분립시키는 등 복음이 곳곳에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원수를 사랑하신 목사님의 은덕을 잊지 않았던 생존자들이 예수를 영접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교회 출신 박종삼 원로목사(1980~2008년 시무)는 “김 목사님은 또 전쟁 직후 고아들을 위해 삼애원 자광원 성애원 시온원 등을 세워 신앙으로 키웠다”며 “이렇게 작은 군단위 읍내에 아동복지시설이 4개나 된 사례는 전무후무할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 4개 시설은 지금도 각기 아동복지시설, 모자원, 양로원, 아동복지시설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전쟁 이후 윤인식·홍순호 장로등이 김 목사가 맡긴 복지시설에서 헌신하던 이들이다.

또 김 목사는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53년 교회 내 교육관에 함평광인고등공민학교를 세워 기독교 인재를 길러냈다. 가난한 농촌 청소년에게 중·고등과정의 이 학교는 꿈의 학교였다. 공민학교는 82년 농어촌 중학교 교육 의무화와 함께 폐교됐으나 그 인맥은 지금도 전남 서부 복음화의 바탕으로 남아 있다. 이와 함께 함평YMCA도 세워 크리스천 리더를 키웠다.

이 교회가 2011년 3월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1911년 류서백·남대리(한국명) 선교사 등이 함평에 들어와 박화윤 이문겸 등을 전도해 예배를 드린 곳이 지금의 교회 뒤편 내교리 언덕배기 초가삼간에서였다.

문성수 원로장로와 옛 교회터를 찾았다. 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교회터는 밭과 잡목숲으로 변해 그 어디에도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무화과 나무가 몇 그루 남아 있고, 지형이 변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가 한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집이 당시 사택입니다. 제가 태어날 때부터 있던 집인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교회 흔적이네요. 48년 지금의 교회터로 신축 이전하면서 내리교회에서 함평읍교회로 명칭을 바꿨습니다. 일제시대 때는 모두 숨거나 쉬쉬하면서 신앙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이처럼 외진 곳에 처소가 있었어요.”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 교회는 부동산의 가치 때문에 옛 선교유적을 밀어버리고, 시골 교회는 유적 보존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일꾼이 없어 폐사지처럼 버려두고 만다. 점점 이렇게 구술할 사람들마저 귀해진다.

읍내는 인적이 드물다. 50~70년대 장날이면 어깨를 모로 두고 걸어야 했던 북적임은 ‘함평나비축제’때나 볼 수 있다. 아무렇게나 피던 자운영꽃도 대단지 꽃밭으로 관리된다. 그러나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것, 이 지역 모교회의 보혈빛 신앙은 한 마리의 양이 있는 한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

국민일보 종교기획부 전정희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