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선 약사의 미아리 서신] 편부 재형이와 편모 준영이는 친구랍니다
입력 2010-10-13 18:41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가을을 한 뼘 저희 앞으로 당겨 놓고 있습니다. 명절이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부침을 지집니다. 온 동네는 기름 냄새로 들뜹니다. 이 고소한 기름 냄새는 굶주린 한 아이의 뱃속을 요동치게 합니다.
어릴 적 집을 나간 엄마. 그 기억의 흔적조차 없는 재형(가명)이는 일 년에 두 번 다가오는 명절이 반갑지 않습니다. 작은아버지 댁에 어른들이 모이면 재형이 형제를 걱정합니다. 나오는 이야기는 재형이 아버지에 대한 질책이 대부분입니다.
성격이 거친 재형이는 중학교 때 저지른 사고로 학업을 마칠 수 없었고 검정고시를 거쳐 공고로 진학을 했습니다. 서류상 부모가 버젓이 살아있는 재형이는 나라에서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지요. 입학금부터 교복, 책가방까지 모두 형인 재훈(가명)이가 마련해 줬습니다.
재형이보다 한 살 많은 재훈이는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일찌감치 직장을 다니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밤에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나갔고요. 그렇게 번 돈으로 동생의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해 왔습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삶에 대한 원망을 술로 풀었습니다. 커가는 자식들의 말 없는 항의와 마땅찮은 세상의 눈길이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던 재형이 아버지는 울화병이 도지는 날에는 여지없이 술 속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했지요. 그날 밤 아이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는 폭력으로 돌아왔습니다. 재훈이는 밤에 일을 해 아버지의 매를 피할 수 있었지만 재형이는 온 몸으로 아버지의 분노와 매를 받아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전 드디어 큰 사고가 터졌습니다.
잔뜩 취한 아버지가 말대답을 하는 재형이에게 매질을 가했죠. 재형이는 손으로 아버지의 팔을 잡았습니다. 재형이는 씨름을 해도 될 정도로 덩치가 크고 힘도 좋았습니다. 화가 끝까지 난 아버지는 군홧발로 재형이의 발을 밟았습니다. 재형이는 슬리퍼를 끌고 집에서 도망 나왔습니다. 큰길가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친구 준영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준영이는 엄마와 상의를 했지요.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집으로 오라고 한 준영이 엄마는 지갑을 들고 재형이가 타고 올 택시를 기다렸습니다. 준영이네도 한부모 가정입니다. 이혼할 당시에 진 빚을 아직도 갚고 있는 준영이 엄마는 지갑 속에 얼마 없는 돈 때문에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아이가 먼저지 하는 마음으로 택시를 기다렸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발로 차에서 내리는 재형이를 보았을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아이를 이리로 보내 주셔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병원 응급실로 뛰어가니 다행히 발톱은 빠지진 않았으나 옆 살이 많이 찢어져 몇 바늘 꿰맸고 발톱은 부목을 사용해 고정하고 온 몸의 상처와 멍을 치료하였습니다. 준영이 엄마는 재형이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지요. 하루 종일 굶었다는 재형이 이야기에 밥을 짓고 마트에서 삼겹살 한 근을 사다 묵은지와 함께 구워 주니 언제 아팠냐는 듯이 재형이와 준영이는 시시덕거리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워 냅니다. 준영이 엄마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습니다.
재형이가 집을 나와 준영이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동전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선뜻 천원을 빌려 주신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재형이는 그래도 행복하고 축복받은 아이입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준영이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얇은 지갑에도 아들 친구를 치료해주고 먹여주고 재워 주는 준영이 엄마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흘려보내고, 맛있는 삼겹살에 웃을 수 있는 맑은 마음을 주신 이가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끄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셔서 재형이는 행복합니다.
이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