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에 시집 낸 박노해씨, “제 詩는 지구마을 민초들의 말씀 받아쓰기”

입력 2010-10-13 18:38

혁명은 짧고 예술은 긴 모양이다. 사노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박노해(본명 박기평·53)씨가 네 번째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림걸음)를 냈다. 시집 ‘겨울에 꽃이 핀다’(1999) 이후 11년 만이다. 13일 서울 신문로 나눔문화 사무실에서 만난 박씨는 “10여년에 걸친 침묵정진의 세월 속에서도 시를 버린 적이 없었다”며 “오히려 단 하루도 시를 쓰지 않은 적이 없었고 시가 없었다면 미치거나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검은 양복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턱수염을 기른 그의 모습에서 스스로 시인으로서의 외양을 갖추고 싶어 한다는 인상이 들었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혁명가이고 예언자입니다. 목에 칼날이 날아들고 심장에 총알이 관통되어도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진실을 절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화는 실상 ‘자본권력의 세계화’였습니다. 국경 없는 거대자본이 물신과 탐욕의 포퓰리즘을 부추기며 국경을 지우고 자급자립의 삶터를 지우고 세계를 평평히 점령해 나가고 있습니다. 세계의 고유한 마을들과 개인들은 가림막 하나 없이 시장만능의 거센 바람에 떨어져 내리고 있지요.”

그는 우리 시대를 하루하루 존재감이 사라져 가고 달릴수록 영혼이 증발되어 가는 ‘저주받은 자유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옳은 말과 비판은 누구나 쉽게 하지만 정작 그 진실을 자신에게 적용하지는 않고 있지요. 저는 우리 삶의 내용과 방식에 대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물음조차 건너뛴 진보에 대해, 근원적 물음을 던지며 대안적 삶과 혁명을 추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이런 시대정신을 담아냈다고 자평했다. “이 시집은 지구시대의 ‘노동의 새벽’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지구시대 유랑의 시이고, 순례의 시이고, 목숨 건 희망 찾기의 시이지요.”

10여년 동안 쓴 5000여편의 시에서 300편을 엄선했다는 그는 “그렇게 많은 시를 어떻게 쓸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제 시는 지구마을 민초들의 말씀 받아쓰기”라고 말했다. “인류 최초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원한 알 자지라에서 아침에 만난 105세 할머니가 ‘어제는 기다리던 첫비를 보고, 오늘은 태양 같은 첫 얼굴을 보고. 먼데서 온 아들아, 우리 집에 가서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샤이를 듭시다’라며 저를 이끌었지요. 세계 민초들은 어디에서나 저에게 그런 시를 들려줍니다.”

그는 시집 편집 과정에서 2008년 촛불시위 당시 막내였던 20대 젊은이들을 참여시켜 그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랐다고 말했다. “내가 각별히 애정을 가졌던 시 100여편을 그 젊은이들의 설득으로 제외시켰지요. 그들이 제외시킨 시들은 머리만 움직이고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은 시들이었어요.” 그는 “2014년 출간을 목표로 삶의 총체적 진보 이념을 담은 책을 집필 중”이라며 “그것까지 마치면 실패한 혁명가로서의 마음의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