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빈민촌 ‘어린이개발사업’ 현장… 쓰레기 더미 위에서도 꿈이 움트다

입력 2010-10-13 17:57


기아대책과 함께하는 회복

필리핀 마닐라에서 승용차로 2시간 정도 달려 도시 빈민촌 다얍에 도착한 건 지난 8월 말 해거름이었다. 어디서 뛰어나온 아이들일까? 수십 명의 아이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저무는 저녁노을에 비친 아이들의 눈망울은 반짝이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했다. 다얍은 태풍 같은 자연재해와 화재 등의 인재로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의 집단거주지다.

현재 2만명에 육박하는 이주민이 몰려와 피폐하기 짝이 없는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도난을 대비해 철망으로 단단히 보안을 한 마켓이라고 말하기에도 궁색한 하꼬방(판자로 만든 작은 집)으로 들어간 기아대책봉사단 이종식 선교사의 손에는 쌀 5㎏이 들려져 있었다. 이 선교사가 찾아간 곳은 집단촌에서도 맨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집이었다.

퀴퀴하고 어두침침한 집안에는 어린아이 다섯과 부부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앉아있을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살림살이라곤 새까맣게 그을린 냄비와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일곱 식구가 이틀째 굶고 있어요. 가장이 마닐라에서 일용직 노동을 했지만 지금은 팔을 다쳐 일을 하지 못하거든요.” 걱정스레 바라보는 나에게 이종식 선교사가 작은 목소리로 던진 말이다.

부끄러운 듯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젊은 엄마, 그녀의 눈은 감사함으로 이슬처럼 젖어 들었다. ‘이틀이나 굶고 있었다니….’ 내 삶의 전부를 뒤돌아보게 하는 장면이었다.

“선교사님! 저들이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교육과 빵 만드는 법을 가르쳐야겠지요. 그들에게 희망의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이 선교사는 절기마다 그들이 당장 먹어야 하는 빵을 제공하면서 그들에게 빵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아이들을 학교와 교회로 인도하고 있었다.

빈민촌 바로 앞에 새롭게 단장한 ‘NHA 다얍 초등학교’가 있었다. 학교로 들어서는데 교실 창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밖을 내다보는 소녀가 있었다. 천사처럼 고운 눈망울이었다.

미소는 쏟아지는 햇발처럼 투명했다. 저문 해의 여운 속에서 일행을 배웅하는 아이들의 환호성은 희망의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아대책의 어린이개발사업(CDP)에 따라 지원을 받고 있는 청소년 중에 세 명의 학생이 대학에 진학했다.

다음날 찾은 산호세동부미션교회는 마닐라로부터 자동차로 1시간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있었다. 이곳 역시 자연재해와 인재에 삶의 터전을 잃고 몰려드는 빈민들로 가득했다. 이 궁핍한 마을엔 어린이들의 아름다운 찬양소리가 가득했다. 산호세교회를 섬기고 있는 기아대책 봉사단 이인로 선교사는 CDP 사역을 통해 5∼15세 어린이 183명을 결연후원하고 있었다. 그가 교회로 들어서자 찬양을 부르던 아이들 수십 명이 몰려와 그에게 매달렸다. 모두 건강해 보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반짝거렸다.

산호세교회를 뒤로하고 근처에 위치한 스모키 마운틴(필리핀 수도권의 모든 쓰레기 매립장)으로 향했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이곳은 일정에 없던 곳이지만 꼭 방문해보고 싶었다. 방독면을 착용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악취였다. 세상의 모든 짐승이 썩어 풍기는 악취가 이만한 것일까? 파야타스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참혹함 앞에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었다.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야 할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참혹한 생활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로 심장에 박히는 순간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의 가난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 속에 박혀있는 악취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삶이 이렇게 위대하고 경이로운 것일까!’ 그들의 삶 앞에 밤새도록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구조적 모순 때문에 아무리 많은 NGO단체가 그들을 돕는다 해도 그들의 삶이 개선되기란 어려울 거 같았다. 그곳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하얀 미소 앞에 부끄러운 마음 담아낼 길이 없다.

다음날 아침 마닐라 공항에서 자동차로 30분가량 걸리는 지점에서 아렌다 마을을 찾았다. 거대한 쓰레기 더미 위에 세워진 도시 빈민촌이었다. 교회와 학교 사역을 하고 있는 기아대책 봉사단 박광수 선교사는 아이들을 통해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었다.

CDP의 혜택을 받는 아이들은 부모와 이웃을 교회로 인도했다. 공동체는 어느덧 3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에게 빵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급식을 함께 나누며 교육을 통해 미래의 지도자를 만들어 가는 게 박 선교사의 중점사역이었다.

박 선교사는 필리핀이 빈민국가로 전락한 건 ‘기적’에 가깝다며 절망적인 한숨을 쉬었다. 한 집 한 집 그가 섬기고 있는 교인들의 집을 둘러보던 중 한 아이에게서 눈길을 놓을 수가 없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건져낸 천 조각을 모아 걸레나 수건을 만들고 있었다. 소년에게 다가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시장에 내다팔면 많은 식구들 중 아이들이라도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노동에만 열중하는 소년의 모습에서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네 모습이 보였다.

해질 녘 아렌다 마을을 뒤로할 때는 어느덧 노을이 푸르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며칠 전 사진가로 다시 우리 앞에 돌아온 시인 박노해의 말이다. “자기 문제 다 해결하고 언제 남을 돌아볼 수 있겠어요. 가난한 나라 외면하는 것은 자살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게도 숙제로 남는 일성이다.

이번 필리핀 마닐라 부근 도시 빈민촌을 취재하며 이름도 빛도 없이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세 분의 선교사를 만났다. 그 밖에 많은 분이 파종하고 있는 희망의 씨앗에 물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은 동시대를 함께하는 지구촌 공동체의 이웃으로서 우리가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일인 것을 알았다.

마닐라(필리핀)=글·사진 조인숙 (사진작가·갤러리 공간 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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