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민태원] 名醫의 스킨십
입력 2010-10-13 18:00
#1 서울아산병원 외과 안세현 교수는 매월 둘째 주 수요일 오전이면 어김없이 서울 구의동의 한 찜질방을 찾는다.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에게서 치료받는 유방암 환자들과의 ‘즐거운 수다’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암으로 유방을 잘라낸 환자들은 남의 시선 때문에 가기 꺼리는 찜질방에서 주치의를 만나 병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마음껏 물어본다. 안 교수도 이날만큼은 ‘의사 선생님’이 아닌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를 자처한다. 7년째 지속해 온 ‘찜질방 교감’으로 환자들과 안 교수는 웬만한 개인사까지 줄줄이 꿸 정도로 가까워졌다.
#2 서울대병원 외과 노동영 교수는 매년 11∼12월이면 원내 유방암 환자 모임인 ‘비너스회’ 회원들과 김장을 담근다. 환자들과 함께 직접 배추를 다듬고 양념도 만든다. 가족처럼 모여 앉아 담근 김치로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한나절을 보낸다. 시간적 한계로 병상이나 외래 진료실에서 들려 줄 수 없었던 질병 극복 노하우도 전해 준다. 담근 김장은 지방에서 올라온 환자들을 위해 마련된 쉼터에 반찬거리로 제공한다. 권위를 벗어던진 노 교수의 모범에 동료 교수, 제자들도 참여해 환자와 의료진 간 마음의 벽을 허물고 있다.
#3 가톨릭의대 서울성모병원 혈액내과 김동욱 교수는 2005년부터 만성백혈병 환자들로 구성된 ‘루산우회’ 회원들과 매달 등산을 한다. ‘환자 교육이 치료에 큰 효과를 준다’는 평소 철학 때문이다. 하지만 진료 시간에는 이 같은 교육이 쉽지 않아 함께 산을 오르며 질병 정보를 전한다. 투병 의지가 중요한 백혈병의 특성상 환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도 들어있다.
명의(名醫)가 뭘까? 병을 잘 고쳐 주는 의사가 명의인가. 병을 잘 고치려면 전공분야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기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뛰어난 기술만 있으면 명의가 될 수 있을까? 앞에서 열거한 의사들은 모두 각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의술을 갖고 있다. 안세현, 노동영 교수는 국내 유방암 치료의 대가로 정평이 나 있다. 김동욱 교수는 백혈병 등 혈액암 치료의 선두 주자다. 하지만 이들이 명의로 불리는 진짜 이유는 이처럼 ‘스킨십 소통’을 통해 환자들과 아픔을 같이하고, 마음까지 보듬어주는 의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면 ‘진짜 명의’는 많지 않다.
요즘 젊은 의사들은 수치만 갖고 염증이 있네 없네, 온도가 얼마네 따지기 일쑤다. 하지만 환자와 공감이 없으면 치료가 잘 안 된다. 환자의 가족 사항이나 경제 사정도 공유를 해야 하지 않을까. 아픈 것도 서러운데 돈까지 없다면? 병원 사회사업팀에 얘기해 치료비를 깎아줄 방법이 없나, 이런 것까지 고민해야 진짜 의사라 할 수 있다. 그냥 치료만 잘하면 로봇이 더 낫지 않을까. 그게 사람보다 더 정확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의학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요즘, 환자들은 점점 똑똑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의사들의 최대 경쟁력은 소통이다. 최근 일부 병원에서 진료 경험이 풍부하고 명의 소리를 듣는 선배 의사들이 젊은 의사들에게 진료 시 필요한 환자와 의료진 간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전수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고무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진료 시 환자와의 눈맞춤이나 대화의 태도, 의학용어 사용으로 인한 설명 부족 등에 대한 교육에 그치고 있는 점은 아쉽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3시간 대기, 3분 진료’가 엄연히 존재하는 진료 현장에서 단순한 대화의 기술을 터득하는 것이 환자와의 소통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로봇이 아닌 인격체로서의 의사가 또 다른 인격체인 환자와 인간적으로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3명의 ‘진짜 명의’가 보여준 스킨십 소통법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환자들은 말한다. 의사에게 의학 지식을 듣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인간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환자들은 바란다. 질병보다 질병에 고통 받는 인간을 먼저 봐 달라고 말이다.
민태원문화과학부 차장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