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이강렬]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싶다

입력 2010-10-13 18:02


“중증 환자에게 두렵고 힘든 것은 죽음의 공포보다 계속되는 통증이다”

1. 영국의 사회학자 스펜서는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기독교 신앙인으로 동의할 수 없는 말이지만 죽음이 인간에게 가장 공포스러움 그 자체인 것은 분명하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조차 십자가에 달리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죽음의 공포를 토로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신조차 두려워하는 이 죽음을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을 능가하는 두려움은 과연 무엇일까?

‘행복 전도사’ 최윤희씨가 최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행복을 찾아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적극적인 ‘행복론’을 펼쳤던 그녀였기에 그가 스스로 선택한 ‘자살’이란 죽음의 방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녀는 ‘자살’이라는 말을 거꾸로 하면 ‘살자’라며 절대로 자살로 불행하게 삶을 마감하지 말라고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서를 보면 그가 선택한 스스로의 죽음에 다소 공감이 간다. “저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가 없고 남편은 그런 저를 혼자 보낼 수는 없고 그래서 동반 떠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 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해 봅니다.”

2. 몇 년 전 어느 날 차를 몰고 가다가 갑자기 몰려온 오른쪽 옆구리 통증으로 운전대를 놓아야 했다. 병명은 신장결석. 통증은 신장에 생긴 돌 때문이었다. 응급실에 실려가 진통제로 통증을 가라앉히기까지 2시간여 계속되는 통증은 죽음 그 자체였다. 실려 가는 차 속에서 몸을 뒤틀며 이 통증이 계속되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돌이 빠져나가기까기 경험했던 극심한 통증은 최윤희씨가 루푸스를 앓으면서 겪었던 ‘700가지 통증’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을 것이다. 호스피스 관리를 받아야 할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중증 환자들에게 가장 두렵고 힘든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함께 끊임없이 계속되는 통증이다. 종종 주변에서 신앙을 가진 말기암 환자들이 “하나님이 나를 빨리 데려가도록 기도해 주세요”라고 지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을 본다. 그만큼 고통은 죽음보다 절박하다.

의학 발달로 통증관리가 가능하게 됐음에도 마약류 진통제 사용의 번거로움과 호스피스 케어가 병원 수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통증관리에 대한 무지로 죽기보다 힘든 통증을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암 환자가 말기에 이르면 대부분 병원은 가족에게 퇴원을 강요한다. 더 이상 치료를 해줄 것이 없다는 이유지만 속내는 병상을 차지하고 있을 뿐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환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극심한 고통 속에 지난한 삶을 마감하는 것이 현실이다.

3. ‘행복 전도사’ 최윤희씨의 죽음을 계기로 통증관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조금 더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최씨는 죽음보다 더 두렵고 고통스러운 700가지 통증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지만 의료인, 환자, 일반인들에게 인간이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통증을 의학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우리의 경우 외국에 비해 호스피스 관리를 받는 비율이 매우 낮다. 전체 사망자의 2%만이 호스피스 기관을 이용한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통증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죽음은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반드시 거쳐야 할 필연의 과정이다. 이 길을 걷지 않고서는 하늘로 돌아갈 수 없다. ‘귀천’을 노래한 천상병 시인처럼 죽음을 이 땅에 소풍 왔다가 하늘로 돌아가는 귀로로 볼 수도 있고, 최윤희씨처럼 남편과 함께 떠나는 ‘하늘나라 여행’으로도 볼 수 있지만 세상을 마감하고 마지막 떠나는 모습은 아름답고 싶다. 이 땅의 삶을 마감하고 떠나는 날 사랑하는 이들과 ‘좋은 만남을 끝내고 아름다운 이별’을 했으면 한다. 하늘나라로 가는 아름다운 열차의 탑승은 ‘통증’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

이강렬국장기자 ry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