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복이 (4) 스물셋의 결혼… 고난으로 축복하신 주님

입력 2010-10-13 17:50


남편인 김철호 본죽 대표와 나는 돈 주고도 못 산다는 초년 고생을 호되게 했다.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청양 집에 내려가 있을 때의 일이다. 눈이 많이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불던 날, 지금은 남편이 된 김 선배가 부모님을 찾아뵙겠다며 집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호랑이같이 엄한 아버지가 받으셨다.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공부하라고 학교에 보내놨더니 연애질이나 하고 남자놈을 벌써 집에 끌어들인다고 화가 있는 대로 나셨다. 선배와 연락할 방법도 없고 갑갑했다.

어머니는 집 밖에서 선배가 오면 돌려보내겠다며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셨다. 정말 바바리를 입고 선배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복이가 졸업도 못하면 되겠느냐’며 선배를 달랬다. 선배는 나도 아버지도 만나지 못하고 눈보라 속으로 돌아갔다.

선배는 읍내 여인숙에서 밤새 10장이나 되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부치고 돌아갔다. 며칠 후 도착한 편지를 읽고 나는 펑펑 울며 아버지께 김 선배와 결혼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결국 나는 4학년 말이던 1986년 10월 김 선배와 결혼했다. 스물셋 나이에 말이다. 함이 들어오던 날 아버지는 나를 부여안고 엉엉 우셨다. 아까워서 못 보내시겠다고. 그때 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1987년 우리 부부는 대전에서 조그마한 출판사와 학습지 회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경험이 없다 보니 금세 망하고 말았다. 88년 달랑 100만원을 들고 아이 하나 업고 서울로 올라갔다. 우리 부부에게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다 돈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물론 경제적 문제였다. 처음엔 쌈짓돈 몇 푼 꺼내 쓰다가 금세 바닥이 났다. 결국 아이를 업고 대전에 있는 친척집에 돈을 빌리러 내려갔다. 아직 돈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벌써 눈치를 챘는지 주방에서 속삭이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절대 돈 꿔주지 말라고. 차비도 주지 말고 쫓아 보내.”

자존심 강한 나는 죽을 것 같았다. 그 길로 인사도 안 하고 아이를 업고 뛰쳐나왔다. 친척이 달려 나오며 몇 만원을 손에 쥐어 주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나는 그걸 뿌리치지 못했다. 올라올 차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 하나님이 주신 선한 열망이 있다. ‘꼭 성공해서 나는 평생 나누어주고 꿔주고 베푸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다.’

남편은 모 일간지 광고사원으로 들어갔는데 수입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이의 백일반지와 돌반지, 결혼 예물을 차례로 팔아 아침에 몇 천원씩 남편에게 줬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남편이 밤늦게 퇴근해 들어오면 자기는 지방판이라며, 지방 출신임을 서러워하며 고개 숙이던 모습을.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짠하다. 남편은 서울 지리를 익히려고 서울 시내를 전부 걸어서 다니며 극복했다.

남편이 열심히 서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동안 나는 신앙인이 되어 갔다. 90년 경기도 부천 삼부제일교회에 출석했는데 구역장이던 김모 집사님이 신앙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분과 함께 주일과 수요일, 금요철야 예배를 드리고 한 달에 한 번 기도원에도 따라갔다. 주일학교 봉사를 하다가 드디어는 20대 후반 나이에 구역장까지 맡았다. 성경 공부를 잘 해보고 싶어서 통신신학 공부도 했다.

한번은 방언의 은사를 사모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 마음의 묵상까지도 아신다는 것을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집에서 혼자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엎드렸는데 방언기도가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