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영성의 길
입력 2010-10-12 17:44
(14) 듣는 기도
기도는 듣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은 친밀한 사람 간의 중요한 특징이다. 주님은 자신을 우리의 친구라고 말했다.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주님이 말한 친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잘 듣고 듣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한다. 그러나 친구는 다르다. 친구 사이엔 비밀이 없다. 마음의 생각, 가슴속에 있는 상처, 미래의 계획을 다 털어놓는다. 있는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듣는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은 모세뿐이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 그래서 성경은 모세를 하나님의 친구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우정이라고 한 16세기의 성녀 아빌라 테레사의 말은 맞다.
기도가 듣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잘 듣지 못하는 것은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기도 자체를 더 의식하기 때문이다. 내 앞에 계신 하나님보다 하나님 앞에 선 나를 더 의식하기 때문이다.
항상 설교 때문에 고민하던 한 젊은 목회자가 설교 잘하기로 유명한 선배 목사를 찾아가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습니까?” 선배 목사님이 물었다. “자네는 설교할 때 교인들에게 어떻게 은혜를 끼칠까를 생각하나, 아니면 어떻게 하면 내가 설교를 잘한다는 말을 들을까를 생각하나?” 젊은 목회자가 대답했다. “솔직히 후자입니다.” 선배 목사가 말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설교가 힘든 것이네.”
기도할 때도 같은 원리가 통한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보다 우리 기도를 믿을 때가 많다.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보다 내 기도의 열심이 강조될 때가 많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기도는 도구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기도 자체에 올인하다가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기도의 수단으로 삼으면 하나님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치 부모보다 부모가 주는 용돈에만 관심을 갖는 아이에게 부모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지만 우리가 호출하면 언제나 달려오는 파출부가 아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한 대로 우리는 자기 열심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기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있는 대로 드러내지 않고 착한 존재로만 세우기 때문이다. 다윗처럼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중세시대의 한 왕이 자기는 제쳐놓고 한 소녀에게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못마땅해했다. “내가 왕인데 하나님은 왜 나에게 말씀하지 않지?” 한 신하가 말했다. “하나님은 왕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다만 왕이 듣지 않는 것뿐입니다.” 소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소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왕의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겸손히 드러낸 자에게 말씀하신다. 열심히 기도하되 자기 열심에 가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그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다.
이윤재 목사 (한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