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사망] 김정일 가르친 北 최고 엘리트, 南선 북한 비판 앞장

입력 2010-10-11 00:22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현재까지 탈북한 사람 가운데 최고위층 인사이다. 그는 망명 전까지 사상과 외교 두 가지 분야에서 활동한 지도층으로 1950~60년대는 주로 사상적 측면에서, 이후에는 외교 임무를 병행했다.

1923년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상고를 졸업한 뒤 일제에 징용됐다가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광복을 맞았다. 이후 평양공립상업학교 교사로 재직하였고,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인 49년 모스크바 종합대학교로 유학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공부했다.

그는 유학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와 31세이던 54년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과 강좌장(학과장)이 됐고, 58년 노동당총비서 서기실 서기로 발탁됐다.

이후 명석한 두뇌와 치밀한 논리로 고(故) 김일성 주석의 눈에 들어 탄탄대로를 달렸다. 55년 말 김 주석이 ‘사상에서의 주체’를 처음 표방한 이후 이를 이론적으로 보좌했다. 그 후 58년 과학원 사회과학부문 위원, 59년 노동당 선전선동 부부장에 전격 발탁됐고, 62년에는 우리의 국회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다. 65년에는 42세의 나이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됐다.

70년대 들어와 그는 당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의장직을 맡으며 최고위층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특히 72년 최고인민회의 의장직(임기 5년)을 맡은 후 11년 동안 3차례 연임한 것으로 유명하다. 74년부터는 김정일 후계체제 작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권력 핵심부에 다가간다. 김정일이 백두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백두산 출생설’, ‘친애하는 지도자’ 등의 호칭을 붙이게 한 것 등이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황씨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해외에 전파하는 외교 업무도 병행했다.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 및 주체사상토론회 대표단장 등의 자격으로 제3세계 각국을 방문, 주체사상을 선전하면서 북한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는 79년 당 과학교육담당 비서 및 주체사상연구소장에 임명되면서 사상분야에서 정점에 섰다. 주체사상연구소는 주체사상을 체계화해 김일성주의로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제3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곳이다.

84년에는 당 국제담당 비서에 올랐다. 당시 김 주석의 비공식 방중 때 단독 수행을 할 정도로 입지가 탄탄했다.

이후 그는 당 국제담당 비서,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인도·중국·쿠바·유럽 등을 돌아다니면서 공산권 붕괴 후 대서방 외교 일선에서 활약했다. 94년 김 주석 사망 당시 장의위원 명단에 26위, 96년 김 주석 사망2주기 중앙추모대회 때는 주석단 서열 21위를 차지했다. 95년에는 오진우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97년 주체사상에 관한 강연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직후 심복인 김덕홍 여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과 함께 베이징에서 한국행을 택했다. 망명 원인으로 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뒤 주체사상을 놓고 김정일 위원장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주체사상 세미나에서 “주체사상은 (김일성 사상이 아니라) 인간을 근본으로 한 인본사상이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는 등 북한 체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런 발언이 평양에 보고되면서 위험이 감지되자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망명 당시 부인 박승옥씨와 2남1녀를 북한에 두고 왔다. 그의 가족은 북한 당국에 의해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