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복이 (1) 1997년 새벽, 나를 깨운 개척교회 십자가
입력 2010-10-10 17:38
2010년 9월 29일. 나는 남편 김철호 본죽 대표와 중국 베이징에 간다. 중국 2호 직영점 개소식도 있고 한식 세계화를 위해 해외팀과 연구소팀이 함께 현지에서 회의를 하기 때문이다.
8년 전 본죽 1호점을 서울 대학로에 열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현재 1200개의 본죽 가맹점과 다른 브랜드(본 비빔밥, 본 국수, 본 도시락) 가맹점 100개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에도 오픈하면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 가는 중이다.
우리 부부는 일을 나눠 한다. 나는 연구소를 맡아 브랜드 제작과 교육을 맡고, 남편은 전체적인 기업운영을 맡는다. 내가 구슬을 만들고 남편은 그걸 꿰는 것이다.
짧은 시간 회사가 급성장하다 보니 일에 치여 삶의 여유를 못 찾는 게 늘 아쉽다. 그럴 때면 가끔 1997년 겨울 정신병원에서 보낸 그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대학병원 신경정신과 병동 4층. 잠 잘 시간이라고 간호사가 불을 끄고 나갔다.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멀리 개척교회 십자가가 보였다. 낮엔 보이지 않던 십자가가 밤이 깊으니 거기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텐데 왜 이제야 십자가를 볼 수 있었을까?’
밤이면 창밖 십자가를 보며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빨리 나가서 아버지 집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오게 해 달라고.
책이나 성경책을 달라 해도 안 된단다. 볼펜과 노트를 달라 해도 안 된단다. 몸에 걸친 옷이 전부였다. 심한 우울증에 신경쇠약, 환청, 불면증, 자살충동 등등. 뭐든 위험하니 주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모두에게 섭섭했다. 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와 있어야 하는지 오래도록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이 안 오면 약을 먹고 긴 잠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밥 먹고 무료하면 목욕을 하거나 간단한 운동을 했다. 인간으로서 가장 단순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남편은 저녁 늦게 호떡 몇 개를 싸 들고 병원을 찾아오곤 했다. 그런 남편에게 응석을 부리기도 하고 아이들이 보고 싶다며 울기도 했다.
3년간 운영했던 화장품 수입유통회사가 IMF 구제금융 때 부도가 나고 여러 협력사까지 함께 도산하면서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까지 못 살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많이 괴로웠고 빚쟁이나 피해자들의 아우성에 아침이면 눈을 뜨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거기다 엉망인 세 아이와 절망하는 남편을 보는 게 너무 괴로웠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빚을 갚기 위해 시골집을 팔고 짐을 싸서 올라와야 하는 상황까지 갔다. 정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결국 견디다 못해 정신을 놓고 쓰러졌다.
98년 1월, 퇴원하고 나서야 남편이 서울 숙명여대 입구에서 호떡 장사를 하다가 남은 호떡을 싸 들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계를 잇기 위해 호떡 장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결단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을까.’ 가슴이 먹먹했지만 한동안 호떡 장사를 하는 남편을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명색이 사장이었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던 사람이 호떡 장사라니!’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았다.
숙대 입구를 몇 번이나 가서 먼발치서 남편을 보다가 눈물이 나 그냥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마음이 답답해 교회에서 기도하는데 너무 부끄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잘 나갈 때는 남편이라고 따라다니고 호떡 장사하는 남편은 못 견뎌 하는 내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나는 그날로 호떡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내 안의 교만과 헛된 자존심은 그날로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았다. 그때는 잘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고난은 하나님의 변장된 축복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