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한글 ‘국보 1호’ 주장은 이제 그만

입력 2010-10-07 17:36


또 한글날이다. 해가 갈수록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커지는 것 같다.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을 들이더니 한글박물관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에게 수출까지 했다. 디지털 세상도 한글의 위대성을 일깨우는 데 일조했다. 자음과 모음의 가획(加劃) 원리에 기초한 한글은 정보를 신속하게 교환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휴대전화 속의 자판을 보면 세종대왕이 고맙다.

한글날이 올 때마다 지겹게 경험하는 것이 국보 1호 논란이다. 상징성이 큰 만큼 한글을 그 자리에 앉혀 국민의 긍지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 문화부 장관도 검토하겠다고 했고, 국회에서도 한글의 국보 1호 지정을 위한 문화재보호법 개정을 발의했다. 지금도 그런 주장이 수그러들지 않았고 식자층에서도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 국보 1호 숭례문과 국보 70호 훈민정음을 맞바꾸자는 방법론이 나오고, 그것도 아니면 무형문화재 1호도 좋다고 한다.

文字는 문화재 될 수 없어

그러나 이 주장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다. 먼저 한 나라의 문자는 문화재가 될 수 없다. 중국이 한자를 자국의 국보 1호로 지정하면 세계가 웃을 것이다. 애국가를 기록한 악보가 문화재가 될지언정 애국가 자체를 국보로 받들 수는 없다. 우리의 고유문화인 한식이나 한복을 국보로 지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무형문화재 1호는 어떤가. 이 제도는 형태가 없는 문화적 자산 가운데 보존이나 전승에 문제가 생겨 기능보유자를 지정하는 취지다. 요컨대 무형문화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거기에 한글을 들이민다? 말이 안된다.

또 하나 혼선을 일으키는 것이 ‘훈민정음’이라는 단어다. 문자와 책이 섞이는 바람에 사람들이 헷갈린다. 앞의 것은 세종대왕이 만든 글자, 즉 지금의 한글이다. 이에 비해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은 간송미술관에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을 말한다. 세종이 서문을 쓰고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풀이한 목판본이다. 이 책을 얻기 위해 간송 전형필 선생이 들인 공은 널리 알려진 사연이다.

이 책은 1962년 국보 70호로 지정됐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해례본이 목판본이라는 것은 언젠가 같은 책이 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국보 1호로 지정하자는 대상은 한글이 아니라 훈민정음 해례본이고, 그것은 한문으로 쓰여졌다. 한문책 1권과 도성의 대문을 바꾸자는 이야기인데, 그래도 괜찮은지.

이제 무의미한 국보 1호 주장은 접을 때다. 중요한 것은 한글교육이다. 한글에 담긴 자주성과 과학성, 실용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김슬옹 교수는 한글에 대해 “하층민의 문자생활을 배려한 민본의 문자요, 자연의 원리에 근접한 우주의 문자”라며 세계적 보편성을 강조했다. 한재준 교수는 “한자는 표의문자, 한글은 표음문자”라는 상식을 뒤집는다. 자모의 모양을 통해 사물의 성질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한글의 정신을 알아야 ‘지구상의 최고 알파벳’의 주인 될 자격이 있다.

한글에 담긴 가르침 익혀야

한글 국보 1호 논란이 난센스인 반면 한글날의 공휴일 환원은 센스 있는 일이다. 국가 최고의 브랜드이자 문화의 원천인 한글을 제대로 기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글날은 1946년 공휴일로 지정됐다가 1990년 공휴일을 줄인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빠졌다. 2005년에 다시 5대 국경일에는 포함됐으나 공휴일은 아니다.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작년 이맘때 “한글날의 공휴일 재지정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기억한다. 유 장관이 남은 임기를 이 일에 집중해 뜻을 이루었으면 한다. 한 부처의 공적을 넘어 민족문화의 차원에서 좋은 일임이 분명하다. 한글날이 들어가면 다른 공휴일을 하루 빼야 한다고? 국민에게 물어보면 답이 금방 나올 것이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