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시대 ‘통신어’를 위한 변명… 당신은 사랑을 어떻게 쓰나요?

입력 2010-10-07 20:28


“사랑해.”

그래, 사랑한다는 건 알겠어. 진지한 태도도 맘에 들고. 그런데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어.

“♡”

심플해서 좋네. 하트는 나한테만 주는 거 맞지?

“사랑해 ♥♥♥”

황송하군. 그래도 좀 식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쩌지?

“사랑합니다.”

갑자기 웬 존댓말? 그런데 날 존중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혹시 지금 떨고 있는 건 아니겠지?

“좋아해.”

당신, 너무 풋풋한 거 아냐? 수줍어서 그래? 나쁘지 않아. 약간 아쉽긴 하지만.

“사랑한다구욧!”

왜 모르는 척 해요? 내 맘 몰라요? 꼭 이렇게 말을 해야 알겠어요? 부끄럽잖아요.

“사랑해용.”

내 콧소리 들려? 귀엽지?

“사랑해욤.”

입술 오므리고 있는 표정 보이지? 애교 부리고 싶어.

“따랑해.”

애기가 되고 싶어, 당신 앞에서는.

“싸랑한다.”

남자답게 말하겠는데, 사랑한다,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한당게.”

귀찮아서 그러냐고? 아니야, 쑥스러워서 그래. 나 이런 거 잘 못하잖아.

“쪽!”

예뻐, 사랑해, 지금 옆에 있다면 키스하고 싶을 만큼. 느끼했다면 미안.

“알라뷰.”

사랑한다는 얘기를 꼭 진지하게 해야 되나? 진지하면 좀 부담스럽더라.

사랑해.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로 주고받는 문자 속에서 이 글은 수십 가지로 변형된다. 그들은 ‘사랑해’라는 글의 밋밋함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사랑해’라는 글에는 담기지 않는 또 다른 의미, 또 다른 감정을 넣으려고 한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글을 쓰는 순간의 표정이나 기분이 어떤지, 그리고 자신만의 개성이나 유머까지 다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해용’ ‘알라뷰’ ‘쪽!’ ‘싸랑한다’ 등을 만들어낸다. 변형된 문자들은 맞춤법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지만 새로운 어감을 획득한다.

김세중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장은 “규범적인 형태로 썼을 때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며 “더 정확하게 마음의 상태나 감정, 느낌 등을 표현하고 싶은데 기존의 표현으로는 그게 잘 안 되니까 새로운 표현을 찾아내는 게 아닌가 싶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는 ‘사랑해여’를 예로 들었다.

“요즘 어미에 ‘∼요’ 대신 ‘∼여’를 쓰는 게 유행인데, 거기에도 어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사랑해요’라고 하면 거리감이 있는 것 같고, ‘사랑해’ 이러면 너무 친근하고, 그 중간 정도의 상태를 보여주려니까 ‘사랑해여’라고 쓰는 게 아닐까 싶다.”

변형의 욕망은 10대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50세가 넘은 유명 인사들이 트위터에 올리는 글들에서도 비슷한 욕망을 확인할 수 있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67)씨는 ‘내 맘 아주 편아아안합니다’ ‘커피 뽑아 시이작’ ‘아주 사치스럽게 이쁘대여’ ‘그냥 놀아버릴까나’ ‘아아 싫다아’ ‘염려해주셔서 감사감사’ 등 어미를 늘이거나 바꿔서 자신의 심리상태를 절묘하게 표현한다.

소문난 트위터 사용자인 박용만(55) (주)두산 회장은 통신어를 빈번하게 사용하며 젊은 감각을 과시한다. ‘다욧해야는데 치맥으로 너무 충전을 했더니 배가 뽀사지려 하는군요’ ‘당근이죠 저도 월-금은 딥따 일해야 하니까 쉬는 주말이 좋지요 금욜만세!!’ ‘야구 잼 없어집니다 ㅋ’ ‘좀 도와주시징 ㅋㅋㅋ’ 이런 식이다.

김문수(59) 경기도지사는 트위터에서도 정확한 맞춤법을 고집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통신어의 유혹을 완전히 뿌리치진 못한다. ‘도의회 도정 질문에 대비해 열공중입니다.^^’ ‘구수한 막걸리 향이 참 좋으네여∼^^’ ‘건강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등의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에서 사용되는 통신어는 그동안 ‘한글파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런데도 통신어는 더욱 왕성하게 생성되고 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세대와 매체를 뛰어넘어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비호감’ ‘열공’ ‘강추’ ‘남친’ ‘악플’ 등의 단어는 이제 방송이나 신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걸 놓고 표준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김세중 단장은 “통신어는 만나서 얼굴을 마주 보며 하는 얘기가 아니라 떨어져서 글로 나누는 얘기다. 그러자니 자신이 쓰는 글에 모든 걸 다 표현해야 되고, 그게 종래의 표현으로는 안 되니까 변형을 시도하는 것”이라며 “사용자가 필요에 의해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통신어는 형태상 글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문어(文語)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대화이기 때문에 구어(口語)적 특성이 요구된다. 그래서 통신어는 구어와 문어의 성격을 둘 다 가진다. 말을 하는 느낌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안녕히 가세요’ 대신 ‘꾸벅’을 쓰는 것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글을 말로 바꾸려는 욕망에서 통신어는 태어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수용된 통신어는 표준어 체계를 교란시키기도 하지만 기존 한국어의 어휘와 표현 경계를 확장하기도 한다.

강희숙 조선대 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전국 국어학 학술대회에서 ‘통신언어의 수용과 확산에 대한 사회언어학적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통신언어로 자주 사용되는 80개의 단어를 놓고 10∼50대 광주시민 35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더니 ‘대박’ ‘빡세다’ ‘쏘다’ ‘짱이다’ ‘당근’ ‘꾸벅’ ‘넘’ ‘훨’ 등 17개 단어는 전 세대에 걸쳐 80% 이상의 인지도를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강 교수는 “통신언어가 생활언어의 일부가 되고 있다”며 “통신언어가 사용 영역을 확장해 국어 어휘 체계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통신언어를 방언으로 보자”는 제안도 참신하다.

“통신언어가 국어를 오염시키거나 파괴시킨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런데 통신언어들이 새로운 어감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50대, 60대들에게까지 퍼진 말도 있다. 통신언어를 한국어의 구성원으로 끌어들여 일종의 방언처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