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시선] 영국판 색깔논쟁

입력 2010-10-07 17:45


9월 26일 영국 노동당은 새로운 당수로 41세의 에드 밀리반드 전 에너지 및 기후변화 장관을 선출했다. 5월 총선 패배 이후 고든 브라운 총리가 물러나고 새 당수를 뽑기로 결정됐을 때 에드 밀리반드는 그다지 유력한 후보가 아니었다. 그의 형이며 외교장관을 지낸 데이비드 밀리반드가 가장 우세했고, 에드는 5명 후보 중 3등 아니면 4등을 하리라 예상됐다. 그런 후보가 다섯 살 위의, 경력도 훨씬 화려한 형을 꺾고 당선이 됐으니 연속극 대본으로도 손색없는 극적인 사건이다.

게다가 밀리반드 형제는 유대인이다. 만일 다음에 노동당이 집권하면 영국 최초의 유대계 총리가 탄생할 수도 있다. 영국은 19세기에 이미 유대인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따라 성공회로 개종한 벤자민 디즈레일리를 총리로 선출했고, 이후에도 유대인이 장관 등 정·관계 고위직에 많이 진출했다. 유대인 차별이 심하지 않은 나라지만 그래도 순수한 유대인 총리가 나오면 전례 없는 일이 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에드 밀리반드가 공개적으로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종교의 영향력이 아무리 약해졌다지만 여왕이 성공회 수장을 겸하는, 그래서 공식적으로 정교분리도 안 된 나라에서 차기 총리를 꿈꾸는 사람에게 유리한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에드 밀리반드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그가 형보다 더 ‘좌파’라는 점이다. 데이비드 밀리반드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신노동당(New Labour)’ 노선을 기본적으로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금융자유화를 비롯해 시장주의적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노동당의 뿌리였던 노조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며, 국제정치에서는 미국의 패권주의 노선에 적극 동조했던 게 신노동당 노선이다. 반면 에드 밀리반드는 이를 비판하면서 금융자본과 각을 세우고, 노조와 더 협조적이며, 국제정치에서는 이라크전이 잘못된 일이었다면서 형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런 점을 들고 나와 일부 보수 언론에서는 벌써 그의 이름 에드(Ed)와 운율을 맞춰 ‘레드 에드’ (Red Ed), 즉 ‘빨갱이 에드’라고 부르며 색깔론 공세를 시작했다. 게다가 밀리반드 형제의 작고한 아버지는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로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랄프 밀리반드 전 런던정경대(LSE) 교수이니, 에드 밀리반드는 색깔론의 표적으로 안성맞춤이다. 색깔론이 우리나라에서만큼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국에서도 ‘좌파’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 밀리반드 당수는 당선 직후 한 인터뷰에서 노동당이 왼쪽으로 급선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공언했고, 당선 이틀 후 전당대회 연설에서는 자신의 당선에 노조의 지지가 결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색깔론 차단에 나섰다.

그러나 색깔론에 이런 식으로 대처해서는 이길 수가 없다. 스탈린이 보면 누구나 우파고 히틀러가 보면 누구나 좌파이듯, ‘좌-우’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색깔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의견은 모두 ‘좌파’ 혹은 ‘우파’라고 공격할 수 있다. 따라서 색깔론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처는 색깔론자들이 좌-우를 나누는 기준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정부가 개입해 특정 산업을 보호, 육성하는 선별적 산업정책이 좌파정책으로 여겨지지만, 이는 사실 우리나라 박정희 전두환 정권, 일본 자민당 정권, 프랑스 드골 정권, 19세기 후반 미국 공화당 정권 등 우파들이 많이 썼던 정책이다.

중앙은행 독립은 우리나라에서 경제민주화를 바라는 좌파들이 주장하는 정책이지만, 유럽에서는 우파가 지지하는 정책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군부독재 시절 한국은행이 재무부 산하 기관 정도로 취급됐던 기억 때문에 한국은행의 정치적 독립이 독재적 ‘관치금융’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거꾸로 유럽에서는 중앙은행이 정치적으로 독립되면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게 되고, 그 성향상 일반 국민의 이해보다는 금융산업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책을 쓰게 된다고 해서 경제민주화를 바라는 좌파가 중앙은행 독립을 반대한다.

복지국가 정책도 많은 사람들이 대표적 좌파 정책으로 생각하지만, 세계 최초로 복지국가 제도를 도입한 것은 보수주의자로 이름난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다(1871년 산재보험, 1881년 국민연금). 지금 스웨덴에서 집권하고 있는 우파 정당들이 복지정책을 줄이고 있다지만, 그 나라 우파들이 적정 수준이라 생각하는 복지 지출은 미국에 가면 좌파도 차마 지지하지 못하는 높은 수준이다.

물론 좌우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예들이 보여주는 것은 좌우 구분이라는 게 어떤 정책 분야를 보느냐에 따라, 나라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좌우 구분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이것은 좌파 정책, 저것은 우파 정책, 따라서 이 사람은 좌파, 저 사람은 우파, 이런 식으로 딱지를 붙이고, 그것으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정치인을 공격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특히 과거에 색깔론으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던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