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의 이건 뭐야?] 약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입력 2010-10-07 18:26


임신 9개월인 친구와 지하철을 함께 탔다. 친구가 빈 노약자석에 얼른 주저앉아 숨을 돌리자 옆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했다. 계속 곁눈질을 하고, 한숨을 쉬고, 코웃음을 치고 하는 바람에 혹시 시비라도 붙을까 조마조마해졌다. 친구는 부랴부랴 ‘다음달에 몸 풀려면 일이겠다’ 어쩌구 저쩌구 하며 큰 소리로 떠들다가 왜 이런 쇼까지 하고 있나 싶어 기운이 쭉 빠졌다.

보는 사람조차 고단한데 무거운 몸 끌고 다니는 임산부들의 고단함이야 오죽하겠는가.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임신한 게 벼슬이냐, 세상에 임신한 게 너 혼자뿐이냐는 말도 들어 보았다는 하소연도 흔하다. 출산율이 떨어진다고 호들갑 떠는 나라에서 곧 출산할 여자들이 받고 다니는 대접이 이렇다.

아예 버스카드에 임산부 코드 인식 기능을 달아서 청소년입니다, 하는 멘트처럼 방금 임산부가 탑승했습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방송과 함께 모든 노약자석에 불이 들어온다면 어떨까 싶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농담. 양보는 어디까지나 양보다.

몇 년 전 사고로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다닐 때도 자리 양보를 못 받아 좀 서운하긴 했어도 화가 나진 않았다. 양보란 사전에 나오는 그대로 ‘사양하여 물러나는 것’이어야지 강제로 끌려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노약자석에 앉은 임산부에게 너 혼자 임신했느냐고 버럭 화를 내거나 노골적으로 노려본 어르신, 이번에 지하철 자리다툼 끝에 여중생의 머리채를 잡아 화제가 된 할머니는 그것을 그다지 양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처음에는 도대체 나이 먹어 왜 저럴까, 하고 눈살만 찌푸렸다. 가만히 지켜보니 그 중 절반 정도는 젊었을 때도 원래 이상했던 사람이 그냥 나이를 먹어서 이상한 어르신이 된 거였다. 나머지 절반은 노약자석을 양보가 아닌 권리라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그것은 열심히 살아온 내 인생 무시하지 마라, 뭐 이런 인정투쟁이었던 것이다. 젊을 때 뼈 빠지게 일하며 힘들게 살아왔으니 지하철이나 버스에는 언제든지 나를 위한 내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공감이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래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보다 ‘약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지 싶은 것이, 하필 그럴 때 인정투쟁의 대상은 언제나 젊은 여성이다.

건장한 젊은 남성이 그런 봉변을 당하는 건 본 적이 없다. 하긴 그 세대에게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력 노동자는 어디까지나 젊은 남성이며, 젊은 여자는 부수적 존재일 뿐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받아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이런 분노의 근원 같다. 사회적 차원에서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지면 이런 웃지 못할 사건이 그만 벌어지지 않을까. 그동안 수고하고 사셨으니까 일정 연령이 넘으면 무조건 대중교통 공짜로 태워드립니다, 이런 것보다는 더 정교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어쨌든 노약자석에 좀 앉았다 해도 임산부에게 화내지들 마시길. 그 아기들이 자라서 경로우대권 같은 걸 지급하는데 필요한 세금을 낼 테니까.

김현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