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출판시대… And 전자책 나왔어요
입력 2010-10-07 20:21
‘마침내 아이북스(iBooks)에서 한국인 최초로 개인출판 저자가 됐습니다.’
지난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유학생 김종찬(25)씨가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 아이북스는 애플의 온라인 서점이다.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도 누구나 전자책을 올려 판매하고, 독자는 아이폰·아이패드로 구매해 읽는 오픈 마켓.
김씨는 ‘개인출판자로 아이북스에 책 내는 법(How to publish your own books on iBook store as an Individual Publisher)’이란 책을 영어로 출판했다. 글을 써서 전자책 파일로 만들고,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도 배정받아 애플과 출판계약을 맺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서울에서 이 과정을 혼자 3주 만에 끝냈다고 한다. 책값은 0.99달러. 김씨가 정한 가격이다. 한 달 만에 100권 이상 팔렸다. 출판 비용? ISBN을 받기 위해 서울 영등포구청에서 개인출판업자로 등록할 때 지불한 면허세 1만8000원이 전부다.
대학 1학년 때부터 틈틈이 소설을 썼다는 이광희(33)씨. 오랜 습작으로 장·단편 작품이 쌓였다. 2004년 졸업하고 출판사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출판사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어요.” 매주 출판사를 바꿔가며 원고를 보냈지만, 등단하지 못한 작가의 글은 3년간 거절당했다.
결국 책을 내지 못한 채 취업했다가 3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를 올 봄에 그만뒀다. 그리고 장편 2권을 포함해 소설책 5권을 출판했다. 지난 5월 문을 연 국내 전자책 오픈 마켓 ‘유페이퍼’를 통해서다.
두 사람은 직접 책을 만들고 원하는 가격표를 붙여 클릭 한 번으로 서점 진열대에 올려놨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원고 들고 출판사 찾아다니지 않아도, 자비로 출판할 여력이 없어도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다는 건데…. 주말섹션 And를 출판해 보기로 했다.
iBooks 출판의 기술
목표는 지난해 11월 섹션 창간 이후 And에 실린 글들을 전자책으로 엮어 국내외 온라인 서점에 진열하는 것이다. 성공하면 독자들은 컴퓨터와 e북 단말기, 스마트폰 갤럭시와 아이폰, 곧 출시될 태블릿PC 갤럭시탭과 아이패드 등으로 읽을 수 있다. 오픈 마켓이 잘 갖춰진 해외 서점부터 시도했다.
세계에서 발행되는 모든 책에는 체계적 유통·관리를 위한 고유번호 ISBN이 부여된다. 아이북스에서 책을 팔려면 이 번호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출판사만 이 번호를 배정받을 수 있다. 방법은 하나. 출판사를 만들기로 했다.
7월 13일 주민등록증을 들고 거주지 관할인 서울 서초구청 민원센터에 갔다. ‘출판사 신고 신청서’와 함께 면허세 1만8000원을 내고 3시간 만에 ‘출판사 신고필증’을 받았다.
출판사명: KUKI(국민일보 쿠키뉴스에서 따왔다), 대표자: 태원준, 소재지: △△동 ○○아파트(우리 집 주소다). 출판 산업 활성화를 위해 2005년부터 이런 ‘1인 무점포 출판사’ 설립이 쉬워졌다.
국립중앙도서관 한국문헌번호센터 웹사이트에서 ISBN 온라인 신청 절차를 밟으니 이틀 뒤 이메일로 번호가 도착했다. 도서명: ‘And-국민일보 주말이야기’, ISBN: 978-89-964789-0-4.
8월 13일까지 발행된 And 기사들을 ‘이슈’ ‘스토리’ ‘인터뷰’ ‘칼럼’의 네 챕터로 분류했다. 모두 179가지 이야기와 관련 사진을 국제 표준 전자책 포맷 ‘이펍(ePub)’으로 완성한 게 지난달 3일이다(이 무렵 네이버에 ‘아이북스 퍼블리셔’란 카페가 등장했다. 전자책 출판을 하려는 이들이 노하우를 공유하는 공간. 두 달 만에 회원 800명을 넘어섰다. 이들에게 물어가며 이펍 제작용 프로그램들을 동원했으나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전자책 제작자 김세훈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제 아이북스로 파일을 전송하면 되는데, 그 전에 애플과 출판계약을 하는 일이 남아 있다. 아이북스에서 책을 1000원에 팔았다고 하자. 애플은 300원을 갖고 700원을 출판자에게 준다. 종이책 인세에 비해 유리한 조건이다. 그 700원 중 10%는 세금으로 원천징수된다. 이를 위해 미국 국세청(IRS)에 팩스와 전화로 신청해 납세자 번호(EIN)를 발급받았다.
이렇게 ISBN, 이펍 파일, EIN을 확보하고 애플과 온라인으로 출판계약을 체결했다(애플이 마련한 웹사이트에 필요한 정보를 입력하면 된다). ‘And-국민일보 주말이야기’ 이펍 파일을 아이북스에 송고한 것은 지난달 24일. 바로 다음날 판매가 시작됐다. 통상 파일 검수에 열흘쯤 걸린다는데 뜻밖에 하루 만에 등록됐다. 김종찬씨처럼 3주 만에 끝내진 못했지만, 책이 나온 것이다.
인터파크, 디지털교보문고, 북큐브
아이북스 출판을 준비하던 8월 초, 국내 대형 온라인 서점 인터파크에 전자책 오픈 마켓 ‘북씨’가 문을 열었다. 이 서비스를 통해 누구나 인터파크에 전자책을 출판할 수 있는 건 아이북스와 비슷하다. 좀 더 친절하게 이펍 파일 제작 프로그램 ‘비스킷 메이커’도 제공한다.
국내에선 전자책은 종이책과 달리 ISBN이 없어도 팔 수 있다. 아직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전자출판협회 등에서 전자책에 대한 ISBN 배정과 통일된 분류 기준을 준비하는 단계다. 유통업체마다 자체적으로 도서 관리 체계를 운용한다.
북씨를 운영하는 인터파크 제휴사 마이디팟의 박용수 대표는 “두 달간 북씨로 출판된 개인출판자들의 책이 400권 정도”라고 했다. ‘스쳐가는 생각’은 한 트위터 이용자가 트위터에 남겼던 글을 편집해 출판했고, 블로그에 쓰던 시를 모아 펴낸 ‘하루하루 세상낙서’도 있다.
지난 1일, 아이북스에 출판한 ‘And-국민일보 주말이야기’ 파일을 북씨 사이트 ‘e북 등록신청’ 코너에 올렸다. 다음으로 찾아간 서점은 전자책 전문인 디지털교보문고와 북큐브. 두 곳은 아직 오픈 마켓을 갖추지 않아 콘텐츠 담당 부서에 전화하니 출판이 가능하다고 한다.
디지털교보문고 유영신 디지털콘텐츠사업 파트장은 “오픈 마켓 플랫폼은 올해 말이나 내년에 개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렇게 개인출판 문의가 들어올 경우 내용을 검토해 큰 문제가 없으면 출판되는 편”이라고 말했다. 두 서점엔 콘텐츠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파일을 보냈다.
사흘 뒤 진행상황을 문의하니 세 곳 모두 파일 수정 작업이 필요했다. 서점마다 전자책 구동 시스템이 달라 각 시스템에 최적화된 파일을 만들기 위해서다. 각 서점 기술진이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출판계약을 체결했다(인터파크 북씨는 온라인으로, 디지털교보문고와 북큐브는 서면으로 이뤄졌다). 수익 배분은 5대 5 또는 6대 4. 우리나라는 책에 부가가치세를 부과하지 않아 세금 문제는 없다.
일주일 만인 7일, 세 서점에서 모두 책이 출판됐다는 전화가 왔다. 아이폰으로 인터파크와 북큐브, 갤럭시S로 디지털교보문고의 전자책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니 ‘And-국민일보 주말이야기’가 놓여 있다.
인터파크에선 개인출판 도서 400여권 중 하나이고, 디지털교보문고에선 전자책 출판계약을 맺은 132번째 개인출판자다. 북큐브에 지금까지 등록된 개인출판물은 극소수다. 전자책 1인 출판. 비전문가에게 이펍 제작은 아직 난관이지만, 출판 절차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고, 오픈 마켓은 이제 하나 둘 생겨나는 중이다.
유영신 파트장은 “스마트폰 갤럭시에 전자책 애플리케이션 ‘교보문고 앱스’를 탑재한 뒤로 일반 독자 상대 전자책 매출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새로운 기회를 맞는 전자책과 함께 1인 출판 시대의 문도 조금 더 열린 듯하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