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송세영] 공(公)의 귀환

입력 2010-10-06 17:52


우리 사회의 중심무대에 섰던 언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념적으로 대칭적인 가치가 쌍을 이룬다는 점이다. 그리고 안정과 개혁, 성장과 분배, 보수와 진보, 안보와 협력처럼 이들 언어는 한 쪽이 대칭어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갖는 게 아니라 상대적 차별성만 갖는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중심 어젠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편을 가르는 데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새로운 국정 어젠다로 제시한 공정사회(公正社會)는 이런 면에서 참 특이한 언어다. 공정(公正)은 대칭어인 불공정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갖는다. 여와 야, 보수와 진보, 좌와 우 어느 쪽도 시비를 걸지 못한다. 편을 가르기 힘드니 잘하면 전부 내 편, 잘못하면 전부 네 편이 될 수도 있다. 그만큼 파괴력도 커서 이 대통령이 후보로 추천한 국무위원들이 줄줄이 낙마할 정도로 후폭풍이 거셌다.

공정의 사전적 의미는 ‘공평하고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참 좋은 뜻이지만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공정거래, 공정무역을 이야기하거나 운동경기 할 때 기본자세나 판단의 잣대로 쓰인 정도가 실사용례의 거의 전부가 아닌가 싶다. 공정은 한 번도 우리 사회의 핵심가치나, 주연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

‘공평할 공(公)’ 자가 들어가는 다른 말들 중에도 비슷한 처지가 많다. 공평(公平), 공의(公義), 공공(公共), 공익(公益) 같은 말들이다. 이념이나 정파를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어젠다 후보로도 거론된 적이 없는 것 같다. 공평할 공(公) 자로 시작하면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말들은 처지가 더 형편없다. 원래부터 나쁜 의미를 가진 말들은 하나도 없는데 부정적 뉘앙스를 갖게 된 말들이 유독 많다.

국정감사 때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공기업(公企業)은 주로 방만경영, 비효율, 흥청망청 등의 표현과 짝을 이룬다. 공무원(公務員)에도 무사안일, 복지부동, 철밥통 같은 말들이 따라붙는 경우가 많다. 공보관(公報官)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대변인에게 밀려났다. 공휴일(公休日)마저 ‘노는 날이 너무 많다’는 딴지 때문에 만인에게 환영받기 힘든 처지다. 공교육(公敎育)이 동네북 신세가 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공원(公園) 말고는 제 값어치 하는 말이 거의 없는 듯하다.

지금과 달리 군사정권 때는 물론 그 잔재가 남아있던 1990년대까지도 ‘공(公)’ 자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 앞에만 서면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 사유재산권은 버텨나질 못했다. ‘공무집행(公務執行)’ 네 글자만 내밀면 이견이나 반론을 펴는 데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툭하면 공권력(公權力)이 발동되고 서슬 퍼런 공안정국(公安政局)이 조성되던 그 시절의 반감은 오래오래 남았다.

여기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바람이 덮쳤다. 정부는 작을수록 좋고, 규제는 적을수록 좋다는 극단적 생각이 보편적 진리처럼 받아들여졌다. 정통 진보 좌파를 자처하는 이들까지 ‘제3의 길’이니 하면서 머리를 싸맸던 것을 보면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시장지상주의, 자유지상주의, 개인지상주의 같은 ‘사사로울 사(私)’ 류에 속하는 온갖 ‘주의’들이 세력을 떨치면서 ‘공평할 공’은 저 멀리 구석으로 밀려났다.

공정이 한국사회의 어젠다로 등장한 것은 그래서 더욱 극적이다. 아마 그동안 사실상 사어(死語) 상태여서 정치적 이념적 오염을 피할 수 있었던 게 재기의 발판이 됐을지 모른다. 전두환 정권이 급조한 ‘민주정의당’ 이후 폐기처분되다시피 했던 ‘정의’가 마이클 센델 교수의 역저와 함께 화려하게 부활한 것과 비슷한 반전이다. 자유 민주 평등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들이 시비의 대상이 돼버린 상태에서 공정 공평 공의 공공성처럼 때 묻지 않은 가치들의 역할은 소중하다. 공무원 공권력 공안 공기업 공교육 공영방송 공익법인들도 더 이상 ‘사사로울 사(私)’에 휘둘리지 말고 ‘공평할 공(公)’의 정신을 되찾길 기대한다. ‘공(公)’의 귀환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송세영사회부 차장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