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가을, 나락이 물 드네… 김제 너른 들녘 ‘아리랑 길’

입력 2010-10-06 17:31


“초록빛 싱그러움을 뒤덮으며 들판에는 갯내음 짙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거칠게 휘도는 바람을 앞세우고 탁한 회색빛 구름이 바다 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시커먼 먹구름은 하늘을 금방금방 삼켰다. 그리고 그 두껍고 칙칙한 구름덩어리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 꿈틀대고 뒤척이며 뭉클뭉클 커져가고 있었다.”(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중에서)

우리나라 쌀 생산량의 40분의 1을 생산하는 ‘징게맹갱외에밋들’이 초록색에서 황금색으로 곱게 물들었다. ‘외에밋들’은 너른 들판을 일컫는 말로 ‘징게맹갱외에밋들’은 ‘김제 만경 너른 들’이라는 뜻.

국내에서 유일하게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전북 김제는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의 무대다. 소설 속의 길을 따라가는 ‘아리랑길’은 벽골제의 아리랑문학비에서 시작된다.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축조되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지금은 거대한 저수지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3.3㎞ 길이의 제방만 남아있다. 무자위 용두레 등 수리농기구가 설치된 벽골제를 나서면 길은 곧바로 원평천 둑길로 이어진다. 갈대가 무성한 원평천은 모악산과 상두산에서 발원한 김제평야의 젖줄로 심포항을 통해 서해로 흘러든다.

벽골제를 축조할 때 인부들이 신발을 털고 간 흙이 쌓이고 쌓여 산이 되었다는 신털미산과 머리를 풀어 헤친 버드나무 군락을 뒤로하면 소설의 발원지인 외리마을이 나온다. 소설에서 감골댁과 아들 방영근이 살던 외리마을은 지삼철과 손판석이 살았던 내촌마을과 이웃사촌. 산이 귀한 들판에서 야트막한 야산을 벗삼아 들어선 전형적인 들녘마을이다. 아리랑문학마을이 조성되고 있는 내촌마을 입구의 대숲은 소설에서 주민들이 참새를 잡아먹던 곳. 댓잎이 서걱거릴 때마다 참새들이 포르르 날아오른다.



소설 ‘아리랑’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가공인물이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대농장주인 하시모토는 실제 인물이다. 죽산면 농토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소작인을 550명이나 거느렸던 하시모토가 농장 사무실과 창고로 사용했던 건물은 죽산면 죽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하시모토는 농장 사무실 뒤편의 야트막한 야산에 올라 눈에 보이는 모든 농토를 사들이라고 한 인물로 농장 사무실은 일제의 한반도 토지 수탈 역사를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코스모스 만발한 아리랑길은 죽산면 해학로에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를 벗한다. 하늘에 닿을 듯 치솟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사이로 황금 들녘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해학로는 아라랑길 최고의 풍경화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던 신작로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빨랫줄처럼 곧게 뻗은 검은 아스팔트길과 황금 들녘이 하늘에서 보면 영락없는 바둑판이다.

아리랑길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달려 남포삼거리에서 망해사까지 13㎞를 일직선으로 달린다. 남포삼거리에서 지평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망해사까지는 1920년대에 간척을 한 곳으로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곡창지대가 펼쳐진다. 그 길이 얼마나 길었던지 조정래 작가는 ‘아리랑’에서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동차를 타도 제자리를 달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곳은 광활면 일대. 얼마나 땅이 광활했으면 지명조차 광활이라고 지었을까. 하지만 황금 들녘을 수놓은 벼이삭 하나하나는 80∼90년 전 갯벌을 농토로 간척한 농민들의 땀과 피눈물이 밑거름이 되어 영근 것이다.

일제는 쌀을 수탈하기 위해 1925년 갯벌에 10㎞ 길이의 제방을 쌓고 농토를 조성하기 시작됐다. 영구소작권을 준다는 꾐에 전국에서 3000여명의 농부들이 몰려들어 온갖 학대와 허기를 참아내며 7년 동안 뼈 빠지게 일을 했다. 하지만 750만평 규모의 간척지가 완공되자 일제는 약속을 어기고 인부들에게 1인당 다섯 마지기의 소작지만 배분했다.

“요런 씨부랄 놈덜이 혀도 혀도 넘무 한당게요. 아무리 즈그 왜놈덜이라고 혀도 땀 한 방울 안 흘린 놈덜헌티 우리보담 열 배가 넘게 논얼 띠주는 법이 시상에 어디 있나요.” “다섯 마지기에 예순 마지기먼 열두 배시, 열 두배.”(소설 ‘아라랑’에서 간척 사업 후 분배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는 농민들)

결국 농민들은 수평선을 지평선으로 만들고 그 땅에 소작인으로 눌러 앉아 또다시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농투성이와 민족의 한이 서린 이곳이 ‘아리랑’의 주무대가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광활면사무소 앞의 정자 앞에는 ‘광활간척사’가 세워져 당시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다.

아리랑길의 종착지는 지평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진봉면의 심포항. 김제의 유일한 항구였던 심포항은 바닷물이 물러나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갯벌이 드러나는 한적한 어촌마을이었다. 트랙터를 타고 나가 호미로 파면 모시조개 바지락 백합 등 온갖 종류의 조개들이 나오던 갯벌은 어민들에게 바다의 문전옥답이었다.

그러나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끝나면서 심포항 앞바다는 오래지 않아 마른 갯벌이 될 시한부 사망선고를 받았다. 김제평야에 갯벌을 내주고 뒤로 물러났건만 이제는 새만금 방조제에 의해 더 이상 물러날 바다조차 없는 기구한 운명이라고나 할까. 김제 어민들에게 바다가 사라진 심포항은 현재진행형인 ‘제2의 아리랑’으로 기억될 것이다.

김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