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까막눈 김순옥씨의 문맹 탈출기

입력 2010-10-06 16:37


[미션라이프] 까막눈.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인을 ‘까막눈’이라 부른다. 서울 천호동 김순옥(46)씨는 까막눈이다.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했다. 한글을 배워본 적이 없다.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다.

10대 시절 김씨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제 생일이 언제예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아직 멀었어.” 몇 달 후 김씨가 또 물었다. “제 생일이 언제예요?” 아버지가 말했다. “벌써 지났어.” 김씨 아버지도 숫자조차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출생 신고는 했다. 하지만 딸의 생일이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김씨는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641226’이 생일인 줄 꿈에도 몰랐다. 알았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글자를 모르면 숫자도 모른다. 숫자를 모른다는 것은 ‘6’과 ‘4’ ‘1’ 등을 읽지 못한다는 게 아니다. 이 숫자의 형태 구분조차 못한다는 이야기다. “달래 까막눈이라는 줄 아세요?” 까막눈은 검은 천을 뒤집어써 글을 못 읽는다는 의미다.

부평역 가요?

초등학교 의무교육 덕분에 보통 한글은 다 읽고 쓴다. 하지만 어떤 이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학업기회 상실로, 어떤 이는 불우한 가정형편으로 이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이들은 이 사회에서 보통사람이 되지 못하고 ‘별종’으로 살고 있다.

여기서 문제 하나. 행선지를 못 읽는 문맹인은 어떻게 버스를 탈까. 인천의 70대 할머니는 버스가 설 때마다 기사에게 묻는다고 했다. “부평역 가요?” 그것도 방법이겠다. 묻다 보면 행선지로 향하는 버스가 올 것이다. 김씨는 “아예 안 탔다”고 말했다. “집 근처 아는 곳만 걸어서 다녔어요. 길 잃을까봐요.”

“같은 걸로요”

문제 두 번째. 메뉴를 못 읽으면 식당에서 주문은? “꼭 누구랑 함께 가요. 그 사람이 ‘갈비탕이요’ ‘육개장이요’라고 하면 저는 ‘같은 거요’라고 해요. 다른 것 먹고 싶어도요.”

문맹인에게 가장 힘든 일은 은행 일을 보는 것이다. 통장으로 입·출금 하려면 계좌번호, 금액을 적어야 한다. 김씨도 은행에 간다고 했다. 다만 그가 은행에 가려면 먼저 은행 위치부터 물어야 했다. 누가 답해준다 해도 간판을 모르니 말짱 헛일이지만…. 간판을 읽지 못해 은행 문 앞에서 은행을 찾기도 했다.

“입·출금할 때 무조건 아가씨에게 부탁해요 ‘저기 언니, 저 글씨 모르는데요. 이름 좀 써주세요’ ‘이것도 부탁해요’라고요.”

어려서 김씨는 계모 밑에서 거의 방치됐다. 재혼한 아버지는 그를 같은 동네의 다른 집에 보냈다. 그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며 살라는 거였다. 또 세 번째 부인과 재혼한 아버지는 열 살인 그를 서울 친척집에 맡겼다. 얼마 후 다른 가정에 보냈다. “아버지가 사채를 썼는데 못 갚았대요. 저를 그 집에 팔았던 것 같아요. 한 7년을 그 집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보니 한글을 못 깨친 거죠.”

“센티미터가 뭐죠?”

김씨도 18세 때 당시 31세 남편과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평탄치 않았다. 남편은 술에 찌들어 살았고 객지를 떠돌았다. 주변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다. 집주인은 “저 새색시 글씨 모르는 바보”라고 흉을 봤다. 옷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지만 버티기 힘들었다. “팀장이 옷을 몇 센티 자르라는데 ‘센티(㎝)’가 뭔지 알 수가 있어야죠.”

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주눅이 들었고 말수가 줄었다. 몸도 아팠다. 철저히 혼자가 됐다. 약 먹고 죽자는 생각도 했다. 그를 살려 준 곳은 교회였다.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자살이 가장 큰 죄라고 설교를 들었어요.”

성가대에서 잘려

23세 때 교회를 처음 나간 것은 한글을 배울 수 있다고 해서다. 서울 천호동 동선교회(박재열 목사)는 한글을 직접 가르쳐 주진 않았다. 하지만 교회는 김씨에게 소망을 줬다. 한글을 배우겠다는 욕심을 갖게 했다.

김씨는 글씨를 읽고 쓰게 해달라고 매일 새벽기도를 드렸다. 한글을 깨치게 기도 좀 해달라고 담임목사에게 매달렸다. 열정에 감동한 목사는 맨 앞좌석에 앉은 김씨의 성경을 펴주고 단상에 올라가 설교했다. 성경을 읽으라고 항상 격려했다.

일하는 틈틈이 노력도 많이 했다. 자신의 이름 쓰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교회 성도들 이름도 무조건 읽고 썼다. 주기도문을 쓰고, 찬송가를 썼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등은 아예 외웠다. 성경도 창세기부터 쓰기 시작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쓴다고 써보지만 글자를 그리는 것에 가까웠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썼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돈이 없어 학원도 못 다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읽기까지 15년이 걸렸다.

글자를 모를 땐 교회생활도 버거웠다. 성가대에서 제명됐다. 가사를 못 읽는데 음표를 읽을 리 없었다. “성가대원 하라고 해도 안 한다는 사람도 많은데 굳이 한다는 사람 못하게 하니까 속상하더라고요.”

헌금 봉투에 ‘김순옥 집사님’

이런 일도 있었다. 한 행정 집사가 헌금 봉투의 자기 이름 뒤에 ‘님’자를 쓰는 분이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김씨였다. 그는 헌금 봉투에 ‘김순옥 집사님’이라고 적었다. 무조건 ‘님’자를 붙여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소망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열매를 맺었다. 2004년 어느 날이었다. “성경을 찾는답시고 목차를 폈는데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글자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예요. 너무 신기했어요. 눈이 트인 거예요.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느꼈어요.”

200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쓰기를 연습했다. 보이는 글자는 모두 썼다. 지하철 내 광고, 지하철역 내에 적힌 시들을 모두 옮겨 썼다. 최근에는 27세 된 아들에게 배워 컴퓨터 ‘타자연습’으로 글자를 익히고 있다.

할 수 있다

한글을 깨치자 삶에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생겼다. 더 이상 움츠려들지 않았다. 예배시간 성경을 함께 읽을 때 큰 목소리를 냈다. 성경을 또렷이 읽자 교회 성도들도 놀랐다. 김씨는 동선교회에서 문맹인으로 이미 알려져 있다. 찬양도 잘하게 됐다. 최근 노인대학에서 찬양을 불러 박수갈채를 받았다. 성가대에서 쫓겨났었다고 하자 다들 놀랐다.

김씨는 “세상에는 글자를 몰라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글자를 완벽하게 익히면 나 같은 문맹인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수치심도 완전히 떨쳐냈다. 글자를 모르는 이들은 대개 인터뷰를 거절한다.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당당했다. 오히려 한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