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경남 김해 명법동 김점시 할머니
입력 2010-10-06 17:46
스물에 낳은 큰 아들이 목사님이지예… 내가 새복 기도 했지
지난 9월 30일 경남 김해시 명법동 명법교회 김점시(73) 할머니를 만났다. 열아홉 나이에 산 너머 칠산 2동에서 명법동 이가(李家)네로 시집와 산 지도 55년째. 예수 안 믿는 집안에 시집와 한동안 핍박받았던 새댁이었다. 당시 김 할머니는 완고한 시댁 때문에 주일성수가 어려웠다. 교회 종소리만 들어도 가슴에 통증을 느껴 남편 몰래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 자녀 중 맏아들을 목회자로 키워냈고, 3년 전에 남편 이의종(76)씨를 전도하는 데 성공했다.
고향이 내가 칠산. 여 등 넘에. 산 넘에. 칠산서 커가 칠산 시집을 왔어예. 그래 이사도 안 가고 아를 여서 다섯을 다 키우고. 아들 넷 딸 하나. 다 서울에 살아요.
열한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
우리 어머이는 내 열 한 살 때 돌아가시고. 그때 호일자<호열자, 콜레라> 바람에. 온 동네 쓸었거든. 토하고 사고 하는 병. 우리 할머이가 칼크럽게<깔끔하게> 해놔노이 숟가락까지 삶고 그랬는데 엄마만 세상 떠나고 다른 사람은 다 괘안코.
대문 밖에다가 단지를 큰 걸 갖다 놓고 동네 사람이 물로 여다 부어주고 바깥에는 일절 출입을 몬하게 허고. 단지로 물통을 장도깡<장독대>이 안 있슴니꺼. 물을 우물로 여다 부어주서 먹고 밭에 정거지<정구지, 부추>도 이웃사람 비다 여 갖다 놓으면 가서 먹고. 그 병이 제일 겁나는 병입니더.
그 전에 큰 화장실 아입니꺼. 똥물로 퍼가 멕이고 그랬다. 똥물이 좋다 카데. 할머니가 파다가 제끼면 맬강이 나오지예. 그걸로 채가 바치고 하지예. 병원에 가도 안 되고 그럽디예. 아버지가 상처를 했지예. 어머이가 죽었으니께네 서모를 얻었지예.
할머니 손에 자라
그래 인자 여동생 하나 있고.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엄마가 세 살 먹어 죽어 노이 얼라가 깨구리 말란 같이 바짝 말라 가 사람 안 되겠다고. 젖을 못 얻어 먹어서. 쌀로 할머니가 꼭꼭 씹어가 냄비 끓이니까 달큼하더라고. 그 키우니라고 할머니 고쌩 많이 했으요.
할머니가 우리 셋을 키왔지. 엄마 있을 때에도 여동생하고 내하고 할머니 곁에 잤고. 내가 시집을 열 아홉 살에 왔거든. 셋째 아들 기 댕길 때 돌아가셨지예. 아들로 치면 셋 째, 딸캉 치면 넷째. 초상칠 때 소고이 국을 끓여 놔노이 셋 째 아들이 기 댕기다 여(배) 디었어. 훙이 쪼까 졌다 카이.
국민학교 입학 두 달 만에 자퇴
지금은 밥도 다 묵는데 마 그때는 쌀도 귀하고 보리쌀도 귀하고 그랬다 아이가.
육이오 사변이 한 지금 60년 됐지예. 60년 됐으니께네 열다섯 살에 그랬네. 그지예. 60년이라 카더라 테레비에 올게(올해). 우리는 피란 안하고 우에서 피란이 내려 왔는디에 우리 아바지가 반장질을 했거든. 집집마다 인자 우리 아바지가 배체를 시켜가지고 밥 해 미고 재우고 이랬십니더. 된장도 막 갈 때 주고 이랬다. 이북 사람도 오고 마이 왔으요. 고상 마이했다.
학교오. 학교 여 놓고 나니 우리 어머이가 세상을 떠났나이. 밭은 많제 농사도 많제 아버지가 퇴학을 시키는지라. “천상 퇴학을 해야겠다. 니 머리가 좋은데 공부가 아깝다. 쪼깨이 대녀도 글로 잘 알고 구구셈도 잘 안다카이. 행편이 이러니 어떻게 하갔노” 이라데. 두 달 됐을끼다. 내 밭 열 마지 매고, 밥 해놓고 샘이 물로 여다 먹는 데 사기단지로 이다 먹고 이랬다. 공부를 못 해 노이 좀 모지래.
“시집오니 집이 쪼매 해더라고”
없는 집에 와가 내가 고생을 마이 했지. 우리 영감. 요 동네 인자 우리 고종사촌 그라니께네 흥부가 있거든. 흥부가 중신을 왔어예. 아버지는 마 생길 사우만 믿고 집도 안 와보고 그랬지예. 첫날 오이께네 집이 쪼매 해더라고. 아우 못 살겠다 싶더라. 죽어도 그 집 구신 돼야 한다 그래 쌌데. 정지<부엌방> 쪼깐한 게 하나 있고. 단 집 옛날 단 집. 천장에 머리 턱턱 받치는기라. 어찌 사노 하는데, 두 손 맞춰 살면 우리도 앞으로 살 수 있다꼬 걱정하지 말라 카는기라. 스물 두 살에 장가 왔는데. 그 소린 하데.
젊을 땐 밸랐어요. 술 마이 자시고 마 노름하고 마 암 것도 없는디. 요사 사람 같으면 벌싸 이혼했으요. 자식들 나 놔가 갈 수가 있나.
영감은 노동일 땅 띠이하고. 흙을 파가 딱 재주면 마 몇 자 몇 자 다 띠어 무면 돈이 얼마고 됐지예. 새복에 일어나면 영감 벤또 아들 딸 벤또 다섯 개씩 쌌다. 보리밥을 밑에 담고 우에 쌀 한 숟가락 씩 엎고. 넘 부끄럽다고 아덜이 그래 싸서.
가슴 찌르던 교회 종소리
교회는 내 어릴 때부터 댕기거등. 친정 할머니가 새복 기도 가면 따라가고. 오바를 더부씨고 날이 추우니께. 어머니는 안 댕기고. 나는 할머니 따라 가이 좋데이. 그리 물이 들어가지고 안 믿는 집에 시집을 와노이 가슴이 미어지는 기라.
시아바지는 첫 제사 지내갔다 카더라고. 가보니께는 떡이 한 쪼가리 있더라고. 섣달 열아홉 날 지나갔다 카데. 시집 와 가지고 용왕 미러 강가에 강질이다, 보름날 밥이야 나물이야 전부 담아가 초하고 소지 조이<소지 종이> 갖고 가서 우리 어머이가 “바다이 용왕님네” 해서 쑵네. 난 외우도 몬한다. 빌어삼스럼 건강 해줄라 카고 오만소리 하더라고. 아들 손주 이름 다 부르는데 소지 조이 태워 하는기라. 바리 타 올라가면 신수가 좋다 안 타고 삐딱하게 날라가믄 걱정거리가 있다 이러데. 그래 하다가 어무이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또 했지. 어무이가 하라케 싸니까 했지. 할 줄 아나. 나물만 해 줘 불고 왔제. 절에도 안 갔을 낀데 세 번 간기라. 염불하는 건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오데.
그런데 교회 종을 치는 기라. 종을 치면 가슴이 막 쓰라리는 기라. 나는 우짜 교회를 가노, 교회를 언제 가 갔노 싶어서.
나를 살려준 건 부엌 기도
나는 부수<부뚜막> 앞에서 기도하고 그랬다. 예수를 믿으니께는 이런 짓은 안 해야지 싶어서. 밥을 다 아사주고 부수 앞에 앉아 기도를 하고 이랬디만. 큰 아들이 군에 가서, 군에 가도 목사님이 계신다카데, 그 목사님한테 은혜를 받아가 와서는 예수를 믿고 신학대학 가서 목사가 되데.
내 교회는 서른 한 살인가부터 나갔다. 나가는데 영감이 책가방을 떤지고 말도 못했으요. 그래 별라드만 인자 좀 나았으예. 술만 췌해가 오면 거울이야 요강단지야, 마 등불 캤거든 호롱불 등 요에 걸어 놔두면 다 뚜드려 부 쌓고.
마음씨 좋은 시어머니
어마이는 예수는 안 믿어도 하늘나라 안 있겠나. 우리 어마이가 마음이 좋아가지고 매느리 댕기는 질에 어푸지까봐 돌도 빼어주까 카이. 돌을 빼이고 싶다 카는 마음을 갖고 있더라고.
영감이 외동아들이거든. 만날 아들 잘 되라꼬 추원이지. 우리 어머이 참 어질어요. 법 없어도 살 사람이에요. 얼마나 잘한다꼬. 애기 낳고 도다리 이런 큰 고기로 사와 미약국 끓여주고. 큰 백합 아인나 어머이 입에 안 넣어 내 주지.
열 아홉 살에 시집와 적 두루마기, 바지, 명지 저고리 하니 낼라 등 다리 씨 담면서 “바느질로 언제 이리 배왔노” 카데. 맨날 며느리 금띵이다 금띵이. 아들은 좀 별라도 시어머시는 글수 없이 좋아. 법 없어도 산다 카이.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는 못 살겠더라 첨에. 허전허니 못 살겠더라.
우리 영감은 고이국도 숟가락 떠보고 한 동강이 어머니 더 드리고 그러더라. 내가 항시 똑같이 여주거든. 그 땐 젊어노나이 내가 똑같이 떠 놨는디 왜 저러는기라 그랬는데. 지나고 나이 참 효자는 효자구나 싶데이.
목사 된 큰 아들
스물에 낳은 큰아들이 목사님이지예. 내가 새복 기도 가서 기도하고 이랬는데 아들이 군에 갔다오고 나니 예수 믿을라고 작정을 하고 나이. 이것 저것 다 해봐도 안 되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하이 응답을 받았다 카데. 제대하고 와서 서울에 맨주먹으로 가가 딱 카시미르 이불 하나 베게 하나 갖고. 근데 요 번에 집도 샀다. 이사를 여러 번 하고 지하실도 가고 고생 마이 했다. 뭐 부모 돈을 안주니 고생 마이했지.
교회 새벽 기도, 청소는 내 몫
믿는 사람이 밸로 없으예. 다 나오먼 한 스무 맹이 될란가. 이 마을에 모다 전도되도록 기도해 싸도 다시 안 돌아와. 교회는 오십 년 넘었으예. 믿음이 없으니께는 교회 좋은 지를 아나. 우리는 좋는데 안 믿는 사람은 안즉 신앙이 안 들어노이 교회가 좋은지 어쩐지 모른다 카이. 남편들도 세 사람 인자 목사님이 전도해 놨으예.
교회에선 내가 젤 작은 편이고, 할머니 중에서는. 모다 요양병원 간 사람들 팔십 먹은 할머이들이지. 청소도 할 사람 없어 내가 한다. 할 사람이 없다. 교회 마당에 풀도 뺄 사람이 있나. 팔십 여덟살 먹는 할매가 있을 때에는 무(문)이라도 닦아주고 하는데. 마 치매 와 갖고 아들이 데꾸 가삐리심니더. 새복 예배 아무도 안 나오니 께는 내하고 목사님 둘이 기도만 한다.
56년된 교회, 처음엔 핍박받아
김태복 목사님은 첨에 내 나갈 때 있었거든. 나 어려서 왔는데 신학대학 할 때 왔는데 잘하더라고. 태복 목사님 있을 때 이웃이 와이샤츠 다 쥐어 뜯고 밥을 자시는데 쥐어 박아 갖고 그리 핍박을 하더니. 핏줄로 타고 다니는 벌거지가 있어 젊을 때 죽었다.
내도 우리 영감이 밤으로 술 먹고 쫓아내 싸서. 내 갈 데 있나. 교회 가 세면 바닥에서 마이 잤으요. 추분데서. 그때 태복 목사님이 한 저그 결혼한 이불 가져다주면서 깔고 덮으라고.
그 다음에 이성효 목사님, 인자 나환구 목사님. 목사님 참 잘합니더. 지끔 사십 여섯인가 일곱인가. 서울서 부목사로 있다 왔다 카더라고. 우리 목사님이나 좀 도와 주이소. 목사님 좀 도와주면 살기가 좀 나설낀데. 사모님이 선생질 하는데 안 벌면 마 생활이 안됩니더. 고생 마이 했지. 다 고생했지. 촌이 되나노이.
자식은 4남 2년데 고새 딸 하나 죽었거든. 딸 중에선 둘 째. 세 살 때 알라. 이웃 사람이 저그 올케 죽고 초상 치고 와가지고. 할머인데 와서 우리 딸 머리 씨 담서 “아고 가길 잘했다” 디다보고 가더만. 아가 새파래 앓는 소리를 하는 기라. 그래 인자 업고 이 밑에 알라 보는 할매들이 있거든. 할매가 나는 모르겠다 병원에 데까 이라, 병원 갔다 업고 올라오는데 죽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부정도 있어요. 그래 하나 잃어버렸으예.
텃밭 채소 장터에 나가 팔아
김해에 시오리(십오리) 된다꼬. 시내버스 있으요. 인자 안 태워 줄라 케이. 여섯시 십오분 차를 타이 학생들 있다고 안 태워 줄라 카이. 일주일에 한 번 쓱 가는데도.
잘 팔리요. 헐게만<싸게> 주면 잘 사가. 비싸게 팔라 카면 앉아 팔아야 돼. 한 움큼에 천원씩 팔라카면 앉아 팔고 장사들한테 주믄 칠백원에 넘길 때도 있고. 한 만 오천원, 작게 나오믄 한 만원. 지세 천원 주지, 차비 이천원 오고 가고 주제 삼천원 띠고 나면 뭐 남나. 고이 하나 사 묵제.
요새는 가갈 것도 없으요. 비도 마이 오고 가을 배차로 인자 깔아 놔서.
예수 믿고 변한 남편
우리 영감은 지금은 술도 많이 안 자시고 교회 나가십니더. 인자 한 3∼4년 됐나 모르겠네. 그래도 안즉까정 믿음은 많이 없고.
영<아주>달라졌지. 뭐 손질도 안 허고 마음도 이제 착하고. 그때는 술이 들가니까 그렇고. 지금은 마음을 바깠는 모양이제. 술은 요래 자시데. 한 모음씩 자시더라고. 담배로 술로 못 끊어. 담배도 한 가치 가지고 너 대 엿 번 분다 카데. 몬 끊어. 영 끊어야 될 긴데. 성경은 취미가 없어요. 주일날 낮 예배만 보믄 안 간다.
찬양도 하는데 가함을 지르고 안 부르고 입만 달싹달싹 그래. 세례 받았으예. 침례. 재작년에 받았는가. 내가 그래 젊을 때 어떻게 했다 카이 “내가 그때는 사람이 아이었는 갑다” 그래예.
지사 안 지낸 지는 제법 오래 됩니더. 내가 영감을 보고 “아들이 목사님인데 어찌 제사를 지낼라카요.” 할아버지는 건강해. 빼빼해도 아픈 데가 없어. 천식만 없으면 아무데도 안 아파. 배차 밭에 버러지 잡으러 나갔어. 나는 가이 안 비더라고. 영감은 오늘 가서 여덟 봤다 카데. 내는 허리만 꼬꾸러지고 다리가 아프고. 다리에 심이 없어. 쏙은 안파예. 뭐 무도 탈도 안 나고.
“하늘나라 가는데 뭐 무섭노”
(교회 간 지) 한 사 십년 됐을 긴데. 지금은 아무 걱정 없으요. 만고 편해. 나는 주일학교부터 할매 살아계실 때 새복 기도 다닐 때부터 교회 가야 마음이 편터라. 마 일욜날도 할머이 따라 교회 가서 예배 보고 이러이 좋데이. 나도 아직 믿음 크게 없으요. 뜨겁게 열이 올라야 될 긴데 그게 없어.
속으로 기도했지. 새복 예배 가믄 이제 말로 카고 하제. 영감 예수 믿게 해 줄라고 기도하고 자식들 모도 직장도 마련해 주려고 기도하고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지금은 마을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나라에 대통령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나라 장관들 위해서도 기도하고 그래예.
작은아들이 예수 믿고 딸 식구가 예수 믿고 하는 게 젤 소원이라. 전도를 많이 해야 하는데 전도도 몬하고. 오래 사는 거 안 좋아예. 너무 오래 살면 자식들 애묵을라꼬. 마이 살 면 한 팔십 되면 돌아가믄 좋겠다. 그기 마음대로 되겠나. 하나님이 불러야 그자? 나는 마 마이 살면 팔십에. 우리 하나님이 팔십까지 불러 가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하나님 부르면 가야 되지. 안 무섭지요. 죽음이 무스 무섭노. 하늘나라 가는데.
■ 명법교회는
명법교회는 경남 김해의 침례교회 중 가장 오래된 교회다. 1954년 김원찬 김만조 김안식씨가 이동장로교회(현 칠산장로교회)에서 나와 만조씨의 아래채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57년 이용철 목사가 1대 목사로 정식 부임했고, 미 남침례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판잣집으로 된 예배당을 지었다. 9대 김태복 목사가 89년 3월 예배당을 신축해 지금의 교회가 됐다. 현 11대 나환구 목사는 대전둔산중앙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다 2002년 마흔 살의 나이에 이곳에 부임했다. 출석 성도 수는 20여명. 농촌 고령화로 65세 이상 노인이 절반이다.
■ 연보
1937년 5월8일 경남 김해시 칠산2동에서 김장배씨 부부(어머니 이름 잊어버림)의 2녀1남 중 장녀로 태어남
1948년 모친 사망
1956년 3월14일 경남 밀양 출신 이의종씨와 혼인. 신부는 19세, 신랑은 22세
1955년 장남 기봉(현 서울 대방동 행복한교회 담임 목사) 출생
1957년 차녀 영희 출생
1959년 차남 기석 출생
1964년 3남 택근 출생
1969년 4남 태진 출생
김해=정리 이경선 기자·사진 서영희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