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영성의 길
입력 2010-10-05 17:49
(13) 묵상 기도
쉬지 않는 기도를 드릴 때 묵상처럼 좋은 것은 없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기도하는 것이다. 시편 119편 97절에 묵상에 대한 좋은 말씀이 나온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이다. 소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읊조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이르는 기도에는 많은 방법이 있다. 4세기에 에바그리우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다섯 가지 기도를 말했다. 순수한 기도, 시편 낭송, 성경 읽기, 애통하는 마음으로 죄를 기억하는 것, 그리고 육체적인 노동이 그것이다. 묵상은 그중에서 성경 읽기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의 통로를 따라 그리스도가 계신 보좌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살았던 생애의 세 단계를 따라가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먼저 세례를 받으셨고, 변화되셨고, 그리고 영화롭게 되셨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임하셨고, 구름 속에서 변화되셨고, 영화롭게 된 후에 불 가운데 임하셨다. 이 세 단계를 우리는 정화(purification), 시련(probation), 보상(rewarding)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묵상은 말하자면 요단강에서 출발하여 변화산을 거쳐 하늘로 올라가는 영적 과정이다. 묵상은 기도하되 성경의 한 구절 혹은 한 마디에 집중하면서 하는 기도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길이가 아니라 내용이다. 또한 배우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읽는다.
프란시스 드 살레(St. Francis de Sales, 1567∼1622)가 이 명제에 대해 이해를 돕는 말을 했다. “단순히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불붙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묵상이라고 한다.” 묵상은 성경을 읽되 분석하기 위해 읽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 읽는다. 독일의 본회퍼 목사가 말한 바와 같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분석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인다. 성경 말씀도 마찬가지다. 마치 마리아가 주님 발 앞에서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받아들이라. 그것이 묵상이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다고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은사이고 은혜이며 나무에 점화된 불꽃이다. 기도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를 믿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기도 만능주의는 성경적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 만능주의가 성경적 기도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속에서 성령이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말씀하도록 우리 마음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잔을 성령의 생수로 가득 채우기 위해 찌꺼기를 제거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성경을 해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성경 공부와 묵상은 다르다. 성경 공부가 말씀을 해부하는 것이라면 묵상은 말씀이 나를 해부하는 것이다. 성경 공부가 쓰여진 문자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묵상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성경 공부가 탐구라면 묵상은 경이로움이다. 묵상은 말씀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성령 자신이 말씀하도록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이윤재 목사 <한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