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장 “백범 ‘총알체 서명’ 마주하면 숙연”
입력 2010-10-04 21:20
“이 분들 글씨체를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짧은 서명에 불과하지만 멋스러움을 넘어 어떤 힘까지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떤 글씨는 강직하고, 어떤 것은 부드럽지만 묘한 매력이 넘치죠. 이걸 필력이라고 해요. 서명에는 저마다 저자의 고유한 내공이 담겨 있어요. 역사적 사건의 이면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기도 하고요. 들여다볼수록 빠져들 수밖에요.”
지난 1일 서울 구기동 삼성출판박물관에서 만난 김종규(71·사진) 관장은 박물관에 전시된 저자 친필 서명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김 관장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김 관장은 지난달 28일부터 오는 12월 31일까지 우리 사회 저명인사들의 친필 서명이 담긴 책 101권을 전시하는 ‘책을 건네다-저자 서명본전 2’를 개최하고 있다. 그는 저자들이 친필로 서명한 책을 통해 그들의 치열한 삶을 느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즉 저자 서명이라는 ‘물리적 사실’이 모여 ‘역사적 의미’를 탄생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 작가가 서명을 해서 다른 작가에게 책을 증정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서명본은 세월이 흐르면 문학사적 가치를 지니게 되죠. 작가들 사이의 친분도 엿볼 수 있고 당시 문단 풍경과 이면사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시회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로 두 번째다. 지난해 전시회에서는 사회 각 분야 저명인사들에 초점을 맞췄다면, 올해에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책을 포함시켰다. 백범 김구 선생이 1949년 윤봉길 의사의 장남 윤종(1929∼1984)씨에게 증정한 책이 전시되고 있는데, 백범의 서명이 심하게 떨려 있어 눈길을 끈다. 담대한 기개를 가진 백범은 왜 손을 떨었을까? 백범은 38년 중국 장사에서 저격을 당했는데, 심장 바로 아래 박힌 총탄이 조금씩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수전증을 얻었다. 백범은 자신의 서체를 ‘총알체’라며 농담하기도 했다고 한다.
“백범의 서명을 볼 때마다 뭔가 가슴을 때리는 게 있습니다. 우리 민족사의 영욕과 위인들의 곡진한 사연이 저 짧은 서명에 담겨 있어요. 숙연해질 수밖에 없죠.”
전시회에서는 유길준이 권재운에게 준 ‘서유견문’ 서명본과 나가륜(중국 국민당 고위 인사)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증정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60년’ 등 역사적인 상황을 증언하는 귀중한 책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학촌 이범선 선생이 소장했던 서명본과 김 관장이 직접 저자들에게 받아 간직해온 서명본 등이 전시되고 있다. ‘히말라야 성스러운 기운을 드립니다’라고 쓴 엄홍길 대장의 서명본과, 그림인지 서명인지 재치 있게 쓴 가수 조영남씨의 서명본도 있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창비)에서 14번째로 김 관장을 소개하며 “왜 그런지 그의 주위에는 예술가, 교수, 정객, 묵은 정객, 회장, 사장들이 판소리 다섯 마당으로 에워싸고 있다”고 썼다. 김 관장이 대뜸 “문화인이 돼야 제대로 된 인간이지”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고은 시인의 평가를 언뜻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