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0-10-03 17:38
(14) ‘우리’의 정체
마가복음을 자세히 읽고 깊이 생각하며 예수의 길을 추적하면서 진짜 감동적인 게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상하기도 하고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족과 친족을 훌쩍 넘어선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현실적인 일은 자신이며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일이다. 그래서 핏줄처럼 명백한 실재가 없다. 예수님은 사람 삶에서 가장 확실한 아군 집단과 결별한다. 바리새인의 정체를 파고들면서 그들이 하나님 신앙에서 내부자가 아니라 외부자임을 폭로한다. 그런데 그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그래도 혈연 집단과 그 중심인 가족은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직장생활과 결혼생활을 하며 친구를 비롯한 사회적인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살지만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물론 나 자신과 가족이다. 예수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된 동기도 아내와 아내의 태중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 아이 때문이다. 아이가 정상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앙을 붙잡게 되었다. 앞으로 전개될 우리 내외의 삶에서 태중의 아기 때문에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하는 지금의 상황이 평생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하다. 아내와 장모님이 확신하는 대로 아이가 장애 없이 태어나더라도 그렇고 또는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내가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지는 나로서도 지금은 모르겠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수님은 가족을 넘어선다.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자신을 찾으러오자 이렇게 말한다. 3장 마지막 부분이다. “누가 내 어머니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집안의 장남인 예수가 가족의 생계를 놔두고 종교적 소명에 따라 집을 나가자 가족이 불편했을 것이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한 뒤 요셉과 마리아의 부부관계에서 태어난 동생들에게 맏형의 출가는 문젯거리로 보였을 테다.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며 가족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장남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혈연적인 우리’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뜻하신 더 넓은 우리의 길을 간다는 게 6장에서 결정적으로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라는 정체가 폭로된다. 예수님이 고향에 간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는데, 사람들이 가르침에는 놀라면서도 예수를 배척한다. 고향 사람들 눈에는 예수가 어릴 때부터 자라던 그 아이나 그 청년으로 보였다. 지금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하늘의 메시지를 그저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사건에서 이른바 우리 집단의 숨겨진 정체가 드러난다. 예수의 가족과 친족까지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길에서는 내부자가 아니다. 그들도 예수가 걸어가는 하나님의 길에서 밖에 서 있는 존재다. 그저 구경하기도 하고 혈연적인 우리 집단의 이익과 전통에 손해라고 판단되면 반대하거나 배척한다.
혈연과 지연 공동체의 집단 이기주의와 결별하면서 예수의 길은 더 또렷해진다. 바리새인도 가족도 외부자다. 이젠 오히려 홀가분하다. 예수는 이제 더 본격적으로 소명의 길을 걷는다. 위로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며, 옆으로는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끌어안는 길로. 여기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참으로 내부자며 동역자다.
지형은 목사 (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