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사라진 지금 스승을 찾아나선 사내… 이제하 ‘마초를 죽이려고’
입력 2010-10-01 17:29
“나는 뭘 배우러 온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림 따위를 배우러 온 것은 더욱 아니다…. 벽이 앞을 가로막거든 밀어붙여라. 밀어젖힐 수가 없거든 부셔버려라…. 어디선가 몽롱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14쪽)
소설가이자 화가인 이제하(73)씨가 장편소설 ‘마초를 죽이려고’(문학에디션 뿔)를 냈다. 지난해 7월부터 올 1월까지 인터넷에 연재한 작품이다. 소설은 진정한 스승을 찾아 헤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 아비와 스승의 의미를 되짚지만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식의 고답적인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스승은 세상이라는 벽과 상통한다. “좀 막연하기는 하지만 뭐랄까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의 그런 이미지 때문이었지 당신이 무슨 대단한 화가라거나 하는 그런 것으로서가 아니었다. 어른이란 소리가 너무 막연하다면 윗사람, 그것도 막연하다면 조언을 받고 따라야 할 대선배 같은 것이라 해도 좋다. 요컨대 그것으로 뭔가를 배우고 가치척도를 삼아야할 아버지 같은 기둥이나 뿌리가 내게는 필요했던 것이다.”(131쪽)
우여곡절 끝에 최홍명 화백의 집에서 머물며 비서이자 제자로 살게 된 주인공은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의 욕망과 열망, 상처와 나약함을 목격한다. 최 화백 곁에 붙어 있는 42년 연하의 젊은 여인 서채리와 아버지의 그림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눅 들린 자식들과 그림을 손에 넣으려는 장사꾼 같은 화랑가 사람들도 등장한다. 전통 산수화의 세계를 해체해 진경산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했던 최 화백이 별세하자 자식들은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의 성북동 집으로 밀고 들어온다. 한해 남짓한 법적 분쟁이 끝난 뒤 선생님의 유작이나 그 어떤 유산도 필요 없다던 서채리는 성북동 집 지하실의 물건만은 자신이 가지겠다고 주장한다. 소설은 서채리와 주인공이 텅 빈 지하실 문을 여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당신이 당신의 전부가 거기 있다고 언젠가 귀뜸하시던 그 공간이 실은 텅 비어 있다는 것은 이쪽에서도 그 어감이나 뉘앙스에서 진작 깨닫고 있었다.”(284쪽)
지난해 가을 경기도 가평에 거처를 마련해 강아지 두 마리를 벗하며 살고 있는 작가는 “스승이란 대명사가 껍질밖에 남지 않은 시대에 아무리 무기력증에 자주 떨어지고 가슴이 답답하다 한들 요즘 세대의 주인공이 제 발로 스승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이런 모티브를 설정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6∼12일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이번 소설 출간을 기념하기 위해 ‘밤의 말과 소녀’(그림) 등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갖는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