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R&D 사업을 해부한다] 1조 규모 ‘WPM 사업’ 10개 중 8개 대기업이 주관

입력 2010-09-30 18:03


(下) 정부출연硏-대기업 편중 지원 심각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산기평)에서 연구개발(R&D) 예산을 다량 수혜 받은 30대 기관 및 업체 가운데 중소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이노와이어리스뿐이다. 그런데 이들 30대 기관·업체의 2010년 투입예산을 모두 합치면 7807억원으로 산기평 전체 R&D 지원 규모(1조8200억원)의 42.9%에 해당한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협회, 대기업의 수혜 구조가 그만큼 뿌리 깊다는 뜻이다.

지식경제부는 30일 세계시장 선점 10대 핵심소재(WPM·World Premier Materials) 사업단을 출범하고 투자협약을 맺었다.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호텔에서 열린 협약식에는 최경환 지경부 장관은 물론 이 사업을 수주한 정준양 포스코 회장을 비롯한 참여기업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WPM 사업은 정부가 2018년까지 세계 최정상급 소재를 만들기 위해 9년간 1조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대규모 R&D 사업이다.

10대 과제 가운데 8개는 대기업이 주관업체다. 포스코가 주축이 된 컨소시엄이 2개를 수주했고, 삼성SDI 제일모직 LG화학 LG이노텍 효성 코오롱패션머티리얼 등이 각각 소재 관련 사업을 수주했다. 중견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아미노로직스 사파이어테크놀로지 등 2곳뿐이다.

산기평 담당자는 “애초부터 대기업을 염두에 두고 출범한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소재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대규모 장치가 수반되기 때문에 대기업이 담당할 수밖에 없고, 대기업이 컨소시엄을 만들어 중소기업을 끌고 들어오는 것이어서 사실상 ‘대기업 책임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이 담당자는 “대기업이 상용화를 책임지고 성공시키겠다는 것이니 정부로서는 고마운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향후 9년간 1조원 규모를 투입하는 R&D 사업을 미래 기술력이 아닌 현재 능력만 고려해 굳이 국가적 지원을 쏟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특히 이 분야 연구 과제를 도출하는 기획위원에는 단 1명의 중소 벤처 기업인도 포함되지 못했다. 지난해 말부터 연구 기획을 시작해 20대 소재에서 국비 지원대상 10대 소재를 추려낸 14명의 기획위원과 소속 기관이 사후 공모절차를 거쳐 R&D 연구자와 기관으로 100% 선정됐다. 산기평 관계자는 “포항공대 총장, 서울대 공과대학장 등 참여 위원들이 모두 최고의 지식을 가진 위원들이기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지경부 담당자는 “지금은 캐치업(Catch-Up·따라잡기)이 아니라 퍼스트 무브(First-Move·초기 진입)가 중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우리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시점인 만큼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부문에 보다 투자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대기업 위주라도 과감하게 R&D 투자를 확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중소업체 시각은 차갑다. 소재를 연구하다 창업한 중소기업 대표 A씨(42)는 “대기업만 ‘퍼스트 무브’하면 다냐”고 반문했다. A씨는 30대 시절 정상급 정부 출연 연구기관 소속으로 R&D에 집중한 뒤 기술 상용화를 위해 창업에 나섰지만 올해 초 R&D 공모에서 탈락했다. R&D 수주 절차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취재팀에게 “공모 과정에서 평가위원과 연결되는 브로커를 만났으며 그에게 수주 금액의 10%를 미리 현금으로 주고 발표를 기다렸으나 탈락했다”는 말까지 했다. 그는 “더 이상 R&D 사업은 하지 않을 거다. 해외에서 부품 소재를 사와서 유통업에나 뛰어들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대기업에 지원이 집중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자 지경부는 2009년을 기준으로 한 R&D 연구 수행 주체별 배분 현황을 보내왔다. 지난해 지경부의 R&D 예산은 4조1000억원이며 이 가운데 출연 연구소는 1668개 과제에 1조5914억원, 대기업은 682개 과제에 6187억원, 중소기업은 3427개 과제에 9295억원이 투입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제 수를 예산으로 나누어 보면 대기업은 과제당 평균 9억71만원이 지원된 반면, 중소기업은 2억7122만원 수준이다. 중소기업이 갖는 상대적 박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소재 공과대학 S교수(45)는 “대기업에 R&D 예산을 대거 투입하는 것은 썩 바람직하진 않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이나 LG, 현대 등은 다들 자기 회사가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잘 모색하고 열심히 한다. 국가에서 삼성전자에 연간 69억원을 준다고 해도 수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입장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돈이다”고 말했다. 물론 같은 돈이 중소 벤처기업에 제공된다면 물줄기를 트는 마중물 역할이 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정부 출연 연구소와 대기업이 결탁하는 위주로 주요 연구가 진행되는 이유는 이들이 삼각 동맹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산기평의 한 관계자는 “출연 연구소는 과제를 확보해 인건비를 마련하고, 페이퍼워크가 약한 대기업은 보고서 작성과 시제품 시연에서 출연 연구소의 인력과 기자재를 사용하고, 정부는 상용화 성공 건수를 높여 효율성이 높은 구조를 대외적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별기획팀=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