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R&D 사업을 해부한다] 110억 사업 중간평가 회의록이 겨우 자필메모 1장

입력 2010-09-29 19:52


지경부·산기평, 과제 기획·결과물 관리 부실

중소기업 A업체 김모 연구원은 지난 7월 국가 연구개발(R&D) 사업 지원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지식경제부가 운영하는 e-R&D 사이트(ernd.go.kr)를 찾았다. 자사에서 개발하는 부품 관련 제품의 사업성이 높고 파급력도 있지만 자금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사이트상의 산업원천기술개발사업, 부품소재기술개발사업 등 여러 분야의 설명을 보다가 눈에 걸리는 대목을 발견했다.

2010년도 과제 공고 현황을 알고 싶은데 추진 일정은 2008년 기준으로 작성돼 있었다. 사업 일정을 알 수 없어 사이트 하단에 적힌 담당자 전화번호로 통화를 시도했으나 담당 부서가 개편됐다는 설명을 들었다. 전화번호와 나란히 적혀 있는 지경부와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산기평)의 인터넷 주소는 사이트 개편 이전의 주소였다. 김 연구원은 “세금으로 운영하는 R&D 사업이 어떻게 관리되기에 공고조차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경부의 e-R&D 사업은 인터넷을 통한 공모와 정보공개,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위해 시작됐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57억원이 투입됐다. 하지만 일부 항목의 경우 관련 내용의 업데이트가 늦어 공모자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과제 선정 이후의 관리 부실도 문제다. 2009년 3월부터 시작된 ‘Configurable 디바이스 및 회로 구현 기술’ 사업의 경우 2014년까지 총 110억원의 국비가 투입된다. 지난해에 정부 출연금 명목으로 20억원, 올해도 20억원 등 총 40억원이 이미 지출됐다. 이 사업은 서울대 인천대 하이닉스반도체연구조합 등 굵직한 산·학·연이 총동원된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의 대표 R&D 과제 중 하나다.

하지만 산기평이 정태근 한나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이 과제의 2010년 연차 평가 회의록은 메모 형태의 A4 용지 1장뿐이다. 텍스트 문서 형태가 아닌 자필로 기록된 뒤 전자문서 형태로 보관돼 있어 시스템상에서 검색하기 불편하게 돼 있다. 회의록 작성을 통해 자료를 온라인 시스템으로 묶어야 비교를 통한 공정성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

디스플레이 분야의 ‘친환경 50인치 Quadro Full HD PDP 기술’도 2010년도에만 15억3000만원이 투입됐지만 역시 중간평가 회의록은 자필 문서 1장뿐이다. 회의록을 보면 총 3명의 중간평가위원이 의견을 개진한다. PDP 기술 과제 계속 지원 여부에 대해서는 “PDP 패널 업체의 적극적 참여 필요. 당초 계획 대비 원만히 진행되고 있어 계속 수행으로 평가함”이라고 매우 간략하게 기재돼 있다.

산기평 측은 일부 이견이 있는 경우에 한해 전자문서 대신 녹취를 통한 음원 파일 형태로 회의록을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업총괄팀 담당자는 “녹취내용을 가지고 별도 녹취록을 작성하는 것은 아니며, 평가 결과가 확정되면 관리하던 음원 파일은 폐기한다”고 덧붙였다.

수년에 걸쳐 수조원이 투입돼 만들어진 R&D 사업의 최종보고서는 어떻게 보관되고 있을까. 과제 수행 기관은 원칙적으로 과제 종료 1개월 전에 최종보고서를 국가에 제출한다. 이 보고서와 중간 평가 관리 기록들은 대전 대덕구에 위치한 산기평 분원 자료보관실로 보내진다. 지난 15일 분원 건물 뒤편의 호젓한 산길을 10여분 걸어 올라가니 인적이 드문 산속에 2층짜리 건물이 나왔다. 간판조차 없는 이곳 2층 241㎡ 면적의 창고에 엄청난 국비가 투입된 결과물들이 잠자고 있었다. 이마저도 절반인 1층 공간은 산기평 분원과 붙어 있는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문서 창고로 쓰고 있다.

산기평 대전 분원 측은 기술 보안상 이유로 보관실 내부 공개를 거부했다. 산기평 경영지원팀 담당자는 “이전 과제와 비교하기 위해 보고서를 보려고 오는 사람이 1년에 3∼4명뿐이어서 보관실에 상주하는 관리인을 두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 담당자는 “서울 본원에서 전자문서로 결과물을 받아 CD로 구워 보관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산기평이 자료 전산화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6년 12월 산기평은 보고서 자료 전자문서화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용역비 9000만원을 들여 이미 소장하고 있던 최종결과보고서 약 2만권에 대한 파일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3개월 만인 2007년 2월 3303권 분량만 전환하고 작업은 중단됐다. 예산 부족이 이유였다. 전자문서화된 파일이 이미지 파일 형태여서 검색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R&D 사업 결과물은 보고서뿐 아니라 지적재산권에 해당하는 특허권과 실용실안 등 무형의 자산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다수 다른 전문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는 보고서 온라인 구축 시스템은 없다. 지식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평범한 진리가 유독 R&D 관련 보고서에는 충실히 적용되지 않고 있다.

정 의원은 “R&D 사업의 기획 평가보고서 등의 전산화와 공개제도는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 환경 마련을 위한 기본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밀폐된 기획 과정을 막을 수 있고, 연구자 간의 소통과 융합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의원은 “기술 노출이 우려되는 보고서라면 일정 부분을 지운 채 공개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면 된다”며 “국가 수준의 연구 역량 증진을 위해 우선 자료 보관 현황에 대한 전수조사와 정보화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기획팀=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