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R&D 사업을 해부한다] 과제 기획→응모→낙찰… 예산 나눠먹기 ‘그들만의 잔치’

입력 2010-09-29 18:19


(上) 불공정한 중장기 R&D 선정 실태

정부가 2008년 12월부터 국비를 투입한 ‘차세대 반도체용 진공공정 실시간 측정 진단 제어기술 개발’이란 과제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S연구원, 삼성전자 K씨, 하이닉스반도체 J씨, ㈜HCT Y씨, 플라즈마트 L씨 등 13개 기관 전문가 13명이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수차례 회의를 거쳐 같은 이름의 총괄과제 1개와 세부과제 3개를 정부 지원 대상으로 추천했고 지식경제부는 예산 투입을 결정했다.

이후 지경부의 한 달여에 걸친 공모와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산기평)의 과제 수행기관 선정 작업을 통해 확정된 연구개발(R&D) 사업 수행자는 이렇다. 연간 5000만원씩 2010년 현재까지 세 차례 총 1억5000만원이 투입된 총괄과제 수행자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다. S연구원 등 26명이 참여했다. 이 연구원은 별도로 매년 7억원씩 21억원이 투입된 세부과제 ‘반도체 진공공정 실시간 측정 기술개발’은 물론 3억원씩 9억원이 소요된 세부과제 ‘스마트형 진공 배기 진단 제어시스템 개발’도 가져갔다.

5억5000만원씩 역시 3년간 16억5000만원이 지원된 ‘반도체 공정 실시간 진단용 고기능 핵심 모듈 및 시스템 개발’ 과제는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 HCT 플라즈마트 등이 만든 컨소시엄의 차지였다. 이들 기획위원은 직접 참여연구원으로 이름을 올려 R&D 예산을 지원받았다. 이 4건의 과제에는 2013년 9월까지 수십억원의 정부 출연금이 더 투입될 예정이다.

에너지 효율이 높아 저탄소 녹색성장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발광다이오드(LED) 사업은 지난해 3월부터 대규모 지원이 시작됐다. 앞서 전북대 ㈜알에프텍 한국광기술원 나노소자특화팹센터 전자부품연구원 한국화학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등의 전문가 12명이 기획위원으로 참여해 수십개의 LED 관련 과제 가운데 정부 지원 대상 과제로 8개를 추렸다.

8개 과제 가운데 기획위원들이 소속된 기관이 실제 과제수행 공모에서 떨어진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올해까지 33억원이 투입된 ‘조명용 4W급 멀티칩 어레이 LED’ 과제는 기획위원이었던 나노소자특화팹센터 J씨를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이 연구하고 있고, 23억7000만원이 지원된 ‘Full Color 감성조명, 제어 및 네트워크 기술’도 알에프텍과 한국광기술원 등이 뭉친 컨소시엄이 담당한다. 이들 사업 역시 2012년 또는 2014년까지 100억원이 넘는 정부 지원이 예정돼 있다.

이런 난맥상의 배경에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중장기 R&D 사업의 추진 절차가 있다. 지경부가 지난 4월 펴낸 ‘지식경제 기술혁신사업 관련 법령 및 규정’은 총 420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정부 지원 과제를 정하는 방식은 크게 대형 선도과제와 중장기 지원과제, 단기 소형 지원과제로 나뉜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대형 및 중장기 과제는 공모로 수행자를 선정하기에 앞서 국비 투입 과제를 정하는 기획위원회 혹은 기술위원회를 두게 돼 있다. 지경부 장관이 산학연 전문가 가운데 15명 내외를 기획위원으로 위촉하며, 기술의 경제성 평가를 위해 산업계 인사의 참여 비율을 3분의 1 이상으로 해야 한다. 기술별 담당 지경부 공무원도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한다. 이들이 지원 대상 과제를 정하는 데 실무적 어려움을 겪을 경우엔 기획실무위원회 등이 꾸려져 기획위원회를 뒷받침한다.

국비 투입 대상 과제가 확정되고 난 이후에는 지경부가 신규사업 공고를 내고 개별 과제의 수행기관을 선발하게 된다. 이를 심사하기 위한 평가위원회가 별도로 꾸려져 수행기관을 정한다. 기획위원회가 담당하는 과제 기획 단계와 평가위원회가 맡는 과제 수행자 선정 단계를 분리한 것은 R&D 사업 지원의 성공률과 효율성을 높이려는 의도라고 정부는 설명했다.

하지만 산기평의 중장기 기술개발 현장에서는 과제 기획 단계에 참여한 산학연 전문가와 소속 기관이 실제 과제 수행자로 낙찰된 사례가 80.3%나 된다. 관련 규정에도 기획위원이 과제 수행자가 될 수 없다는 조항은 없다. 국비 투입 대상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주식시장에서 이득을 보기까지 하는데 관련 규정은 턱없이 느슨한 현실이다.

바이오 의료분야 기획을 담당했던 A위원은 “첨단 기술뿐 아니라 사업화 능력까지 보여주어야 하는데 공고가 나고 30일 만에 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의료기기 업체 대표인 A위원은 “30일간 준비해 공모에 뛰어들더라도, 기획위원으로 처음부터 관련 연구 정보를 접했던 팀과는 경쟁이 안 돼 대다수 공모 경쟁률이 1대 1인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과제 선정 당시 평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B교수가 연구실 조교들을 이끌고 뒤늦게 과제 수행 연구원으로 참여한 경우도 발견됐다. 나노 분야 대표 전문가인 B교수는 “공모에 참여한 기관의 제안서가 나빠 지원 대상에서 뺐더니 산기평에서 관련 연구가 빠지면 총괄과제 수행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했다”며 “사후에 과제 총괄 연구기관을 통해 참여를 권유받았다”고 해명했다. 그는 “연구비를 직접 수령하지 않았고 실험 재료는 간접적으로 지원받았다”며 “(평가위원이 사후에 참여한 데 대해) 지경부 관계자로부터 문제없다는 대답까지 들었다”고 밝혔다.

특별기획팀=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