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품? 도심 한복판 산 자와 죽은 자의 교통 공간

입력 2010-09-29 18:16


■ 서울 안국동 안동교회 추모의 벽 ‘생명과 안식’

서울 사대문 안에 서구식 추모공원 성격의 추모 공간이 마련됐다. 고상하면서도 조촐했다. 길이 18m, 높이 210㎝, 두께 30㎝의 ‘추모의 벽’.

안국동 27번지 안동교회 뒤뜰에 마련된 이 벽은 덕성여자고등학교에 등을 댔고, 우로는 윤보선 전 대통령 고택과 나란히 섰다. 24일 오전 벽 앞에는 두 개의 화분과 한 개의 꽃다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화분에 달린 분홍 리본에 눈길이 갔다. 검은 매직펜으로 정성스레 쓴 ‘손 최희욱’이란 글씨다. 이슬을 머금은 꽃잎이 아직 시들지 않았다.

이 추모의 벽은 우리 장묘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실험이기도 하다. 유골함이 없기 때문이다.

여느 곳에서라면 혐오시설이라며 벌써 플래카드가 나붙고 주민이 들고 일어섰을지 모를 일이다. 교회 안이라는 특수성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북촌의 정서는 죽은 자들의 작은 공간을 허락했다. 이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곳 앞에 차를 세워두었고, 옆 건물의 여고생은 종종 그곳을 내려다보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추석 전 주일에는 130여명의 유족들이 합동 추모예배를 드렸다.

이 벽은 김기연(51·안동교회 집사) 인제대 건축학과 교수의 작품이다. 김 교수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8개월간 밤낮으로 작업했다. 아내인 박순우(50) 재불 조형예술 작가와 남양주와 부산에서 각각 이름난 석공 2명을 포함해 연인원 250여명이 투입됐다. 추모의 벽의 또 다른 이름은 ‘생명과 안식’. 자칫 고인과 후손에게 누가 될까 근신하고 또 근신했다는 김 교수는 완공된 지난 겨울부터 봄, 여름, 가을을 지내고서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어느 날 바바리코트를 입은 한 여성이 추모의 벽 앞에 서 있더라고요. 한 폭의 그림같이 너무도 근사해서 몰래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는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거예요. 기일에 맞춰 찾아온 후손이었던 거죠.”

과정 뿐 아니라 결과에서도 감동을 줘야 한다는 그의 건축 철학이 방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김 교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오래된 담벼락도 훼손하지 않은 채 공사를 진행했다. 고인들의 집이라는 점, 선비정신이 깃든 민족교회라는 점 등을 감안해 검소하면서도 절제된 양식을 지켰다. 액세서리라면 요한계시록 22장 1∼5절 말씀이 적힌 성경과 생명의 나무를 형상화한 작은 조형물, 생명수를 연상케 하는 미니 폭포 정도다.

210㎝의 높이는 건축 용어로 휴먼 스케일이라 불리는 높이다. 끝단이 사람의 시선을 과도하게 끌어당기지 않아 위압감을 주지 않으면서도 친근한 건축 방식이다.

고인들의 이름을 새긴 명패석 또한 한 손에 잡히는 적당한 크기다. 납골당 유골함 자리엔 명당이 따로 있어 죽어서도 없는 사람은 괄시당한다지만 명패석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다만 먼저 간 자 대로 순번이 매겨질 뿐이다.

고 안태인·윤경희, 윤보선·공덕귀···. 유경재(72) 원로 목사가 신앙의 선배로 기억하는 안태인 장로 내외를 이어 윤보선 전 대통령 내외가 이름을 올렸다. 3대에 걸쳐 채워진 명패석이 200개다. 나머지 공간에 채워질 명패석 수는 600개. 빼곡히 이름이 적히기까지 족히 100년은 걸릴 것이다.

곡절도 많았다.

추모의 벽 준비위원회가 꾸려진 때가 10여 년 전이다. 추모 공간은 은연중에 혐오시설로 각인돼 교회 지하나 건물 뒤 벽면에 숨겨질 운명이었다. 김 교수가 작업을 맡으면서 추모 공간은 볕바른 뒤뜰 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비용이 문제가 됐다. 출석 성도 수 500여명의 교회엔 적잖은 재정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예산을 쥐어짰다. 소규모 건축이어서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업체들은 저마다 손사래를 쳤다. 기독교 조형물에 익숙지 않은 석공은 힘 있는 직선을 표현하는 데 실패를 거듭했다. 하지만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석공은 손해를 감수하고도 당초 제시한 금액만 받고 임무를 마쳤다. 고인의 명부를 작성하는 권사는 진땀을 빼야 했다. 자녀가 없거나 후손이 교회를 떠난 고인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소천일, 직분을 알아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힘든 작업인 만큼 보람도 컸다. 남편을 먼저 보낸 백발의 권사가 “고맙다. 내 자리를 만들어줘 고맙다”라고 말할 땐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는 김 교수다.

이제 이웃 교회는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와 사찰에서도 견학한다. 고인의 호텔이라는 최신식 봉안당이나 서울 근교의 겅성드뭇한 묘소들과 달리 비용도 차지하는 공간도 적기 때문이다.

후일 유골을 넣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명패석 한 개 값은 20만원. 납골당 한 칸 비용은 통상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경제성에 접근성까지 두루 갖춰 장묘문화의 획기적인 대안이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건축가 입장에선 검소한 종교 건축의 본이 되고 싶었다.

“가장 기분 좋았던 말이 ‘기독교 건축의 교과서’라는 말이었어요. 종교 건축은 경건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검소하고 절제된 건축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데 호화 청사를 연상케 하는 초대형 건축만 고집한다면 감동을 주기보다 실패한 교회 건축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마르세유와 파리 라빌레트 건축학교를 나와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로 활동한 김 교수는 감동을 주는 대표작으로 스위스 건축가 피터 줌토(Peter Zumthor)의 예배당을 꼽았다. 피터 줌토는 독일 클라우스 형제의 순교를 기억하기 위해 마을에서 모금한 돈으로 예배당을 지어 지난해 건축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클라우스 예배당은 야산에서 채취한 가는 원목과 흙, 콘크리트를 활용해 지은 친환경적이면서도 절제된 양식의 건축물이다.

추모의 벽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개념 둘. 기독교에서 말하는 추모란 죽은 자를 기리는 것이 아닌 죽은 자의 덕과 신앙을 기리는 것이다. 또 하나. 사도신경에 나오는 ‘성도간의 교통하는 것’의 ‘성도’란 죽은 자와 산 자를 모두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황영태 담임목사와 유경재 원로 목사의 정리다.

늦은 저녁. 진입로(주차장) 바닥에 설치된 8개의 LED 등은 영혼의 유도등처럼 추모의 벽으로 이끌었다.

글 이경선 기자·사진 신웅수 대학생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