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두 섬처녀 성처녀] 중매 좀 서도 될까요?… 바빠서 결혼 못했답니다

입력 2010-09-29 18:11


■ 안산 풍도 김정순 목사

전도사 방공호

1984년 초 풍도는 비어있다시피 했다. 김정순 목사와 주민 5명이 섬에 남은 전부였다. 대부분이 고기떼를 따라 인근 섬 도리도로 이주해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 사이 풍랑을 피해 풍도에 정박한 배가 있었다. 배와 함께 건장한 선원 몇 명이 섬에 상륙했다.

인적이 드물자 김 목사는 무서웠다. 그래서 철야기도를 시작했다. 허술한 집보다 교회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날이 거듭되면서 피곤이 쌓였고 그날은 집에서 쉬고 싶었다. 김 목사는 집으로 향했다.

선원은 처녀가 혼자 산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캄캄한 마을에서 불 켜진 집을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선원도 김 목사의 집으로 향했다. 잠깐 주변을 둘러본 그는 주저하지 않고 울타리를 넘었다. 순간 “첨벙” 하고 소리가 났다.

김 목사가 며칠 전부터 “저걸 퍼내야지” 했던 오줌 웅덩이에 빠진 것이다. 오줌이 썩어 시커멓고 냄새가 고약했다. 빗물이 고여 처렁처렁했다.

다음날 도리도에서 방을 마련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왔다. “혼자 무섭지 않았어요?” “무섭긴요, 뭐.” 김 목사가 거짓말을 한다면서 섬사람들이 웃어 젖혔다. 웅덩이에 빠진 선원이 우물에서 몸을 씻다 들켰던 것이다. 웅덩이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말했다. “저것이 전도사 방공호여.”

섬엔 섬사람이

풍도는 김 목사의 고향 영흥도에서 맨눈으로 보인다. 1980년대 초 인천 한 교회 전도사 시절 어느 선배가 풍도 이야기를 했다. “전도사들이 몇 명 들어가긴 했는데, 매번 쫓겨 나오네.” 김 목사는 섬에 살던 자신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두가 안 났어요. 표를 사려다 몇 번을 돌아섰어요. 매표창구에 돈을 내밀었다가 다시 뺏기도 했죠. 그러고 나서 그 선배에게 풍도 주민을 소개 받았지요.”

주민들은 싸늘했다. 아는 척도 안했다. “얼마나 버티나 보자”는 식이었다.

소개받은 주민과 모시고 간 어머니, 김 목사 셋이 한동안 예배를 드렸다. 찬양과 율동을 가르쳐주자 아이들이 몰려왔다. 6개월 만에 초등학생만 20명이 됐다. 당시 마을 인구가 100여명밖에 안 됐을 때였다.

그러나 몇몇은 적대적이었다. “누명을 씌우더라고요. 어느 노총각이 결혼을 했는데, 가정 불화가 생기니까 그 아내가 날 탓하고 나섰어요.”

섬사람들은 섬 아낙네 편이었다. “망신을 주고 대단했죠. 그렇게 하면 섬에서 나갈 줄 알고. ‘실컷 그래 봐라, 누가 이기나 보자.’ 그때부터 고집이 세졌어요.”

결혼, 아무나 하나

그러다 마을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교회 인근의 창고였고, 못살게 굴던 그 집의 네 살배기 아이가 그 속에 갇혀 있었다. “아이가 보이기에 무조건 들어가 안고 나왔어요. ‘전도사가 아이를 살렸다’고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죠. 그 아낙네가 고맙다고 하더군요.”

이후 교회가 세워졌고 마을은 변하기 시작했다. 용왕제가 없어지고 개별적으로 굿을 하면서도 눈치를 봤다. 그마저도 없어졌다. 교회 출석 인원은 많지 않다. 주민 70여명 중 10명 안팎이 예배를 드린다. 그것도 장년층은 몇 안 되고 노인이 대부분이다. 김 목사는 교회 일꾼이 없다고 걱정했다.

결혼 않고 목회만 하기로 했냐고 물었다. “독신주의냐고요? 아니에요. 교회 일꾼이 필요해서 지금은 남편이 절실해요. 특히 힘센(오해는 말라는 웃음).”

핑계

결혼은 바빠서 못했다고 한다. 신학교를 휴학하고 섬에 들어온 그는 이곳에서 야간으로 공부를 마쳤다. 1년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배를 탔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고, 평생교육원을 다녔다. 피아노, 드럼, 아코디언을 배 타고 나가 배웠다.

목회를 안 했으면 결혼을 했을까. 김 목사는 19세 초신자 때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자살소동을 벌인 성도를 보며 살려주시면 그러겠다고 “멋도 모르고” 약속했다. 그 일이 10년 만에 떠올랐다. 목회가 선택사항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김 목사가 말을 흐린다. “눈에 띄는 분이 있긴 해요. 3년 전부터 잘해 주시는데, 마음을 알 수 있어야죠.” 옆에 있던 이 교회 집사가 말했다. “목사님이 늘 하시는 말씀 있잖아요. 기도해 보시라고.”

■ 영광 송이도 김순희 전도사

전도사답게 살라

송이도교회는 옥수수와 배추 밭에 둘러싸여 있다. 반경 50m가 밭이다. 아래 인가는 등을 지고 있다. 오래된 건물이다. 1975년도에 지어졌다. 해풍을 차단하기 위해 드문드문 설치된 창문과 낡은 흰색 벽이 보이는 전부다. 스테인리스 미닫이 문 소리가 날카롭다. 바닥은 한기를 막기 위한 두꺼운 깔판이 얼기설기 깔려 있다.

“저 깔판을 덮고 전도사가 코 골며 잔다고 소문이 났었네요.” 김 전도사 웃었다. “섬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지요. 새벽에 가 보니 술 취한 선원이 깔판을 덮고 자고 있었어요. 코까지 골면서요. 잠잘 데가 없나 싶어 그냥 돌아왔는데, 한 성도가 교회를 갔었나 봐요. 불을 켰겠어요? 슬쩍 보고 저라고 생각한거죠.”

풍랑을 피해 섬을 찾는 선원들은 가끔 불청객이 된다. 일부 선원들 때문에 어려웠겠다고 하자 김 전도사가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부딪치는 사람이 섬사람과 선원이 전부여서 그렇지, 선원이 다 나쁜 것은 아니에요.”

그러면서 일화를 소개했다. “3년 전쯤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려는데, 성도들은 아무도 없고 낯선 선원만 앉아 있는 거예요. 심장이 벌렁벌렁거리고 솔직히 무섭더라고요. 기도도 눈을 뜨고 했어요. 눈 감고 기도할 때 어떻게 할까봐. 설교를 반절쯤 하니까 한 집사님이 오셨어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결혼 안 한 여성이 그것도 섬에서 목회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김 전도사는 늘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사소한 일도 구설에 올랐다. 코를 고네 마네도 흠이 됐다.

남의 밭에 옥수수를 몇 알 심었다고 “전도사답게 살라”며 무안을 겪었다. 서로의 밭에 옥수수 몇 알 심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다. 삿대질도 당했다.

교회 왕복 8시간

“여성 전도사인데다 혼자 산다고 무시당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치매 노인의 똥걸레 빤 게 누구냐고 항변도 하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그럴 수 있나요.”

김 전도사는 독거노인들을 수발했다. 서울에서 배운 기술로 동네 사람 파마를 도맡아 했다. 독한 파마약 때문에 토하기도 여러 번 했다. 고기 잡으러 바다에 간 부모 대신 아이들도 돌봤다. 아이 업고 밥을 먹어 늘 체했다.

그 덕에 이제는 동네 사람들과 터놓고 지낸다고 한다. “가족처럼 지내니까 더 부담스러워요. 가족 전도가 제일 어렵잖아요.”

송이도는 2003년도에 들어왔지만 그는 94년부터 섬사람이었다. 전북 익산이 고향인 김 전도사는 직장생활을 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측 신학교에 입학했다. 전도사 3년 과정을 마친 후 첫 사역지가 제주 인근 추자도였다. 한 목회자가 주일학교 교사로 탁월했던 그를 추천한 것이다.

김 전도사는 아이들 교육에 전문가다. 그의 열정과 역량은 모 교회 전북 익산 삼성교회에서 유명했다. 13년 개근 감사패도 받았다. 주일학교 교사로서 이 기간동안 예배에 빠진 적이 없다. 경남 밀양에서 일할 때도 매주 익산을 찾았다. 왕복 8시간씩 버스를 탔다. 심방 전도사였던 그는 추자도교회의 주일학교도 크게 부흥시켰다.

쌍꺼풀

이후 영광 각이도로 옮겼다. “각이도 사람들 소원이 기차 한번 보는 것, 돼지고기 먹어 보는 것이란 말에 관심이 쏠렸어요. 전기도 하루 4시간만 들어온다고 했어요. 할 일이 있겠다 싶어서 옮겼죠.” 그는 8년간 각이도에 살았다. 전체 섬주민 여덟 가정 중 여섯 가정을 전도했다.

송이도는 세 번째 사역지다. 송이도교회 목회자로도 세 번째다. 성도는 5명 정도다. 꽃게와 민어 잡이를 하는 주민 70여명 중 극히 일부다. 그는 “할 일이 많다”고 했다.

그는 쌍꺼풀 있는 큰 눈과 고른 치아를 가졌다. 작지 않은 키다. 젊었을 땐 인기가 많았을 법했다.

“없었다면 거짓말이고요.(웃음) 20대 후반부터 맞선을 보긴 봤어요. 그런데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고요. 또 섬에는 젊은 사람들이 없어요. 추자도 각이도 송이도 등 섬에서만 있었더니 젊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야죠. 처음 추자도교회를 소개한 목사님이 지금도 그러세요. 저 결혼 못한 것은 자기 탓이라고. 섬으로 보내 시집도 못 가게 했다고요.”

풍도(안산)=글 전병선 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junbs@kmib.co.kr

송이도(영광)=글 전병선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