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溫 시네마] 좌충우돌 유쾌한 소동 속의 사랑과 진실
입력 2010-09-29 17:42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이지만 설혹 돈이 많아도 안 되는 것이 사랑이다. 세상에서 가장 별 볼 일 없는 남자가 최고의 여성을 품에 안는 법이다.
뛰어난 감독이지만 그 뛰어남만큼 빛이 나지 못했던 김현석 감독의 신작 ‘시라노연애조작단’은 유쾌한 소동극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늘 그렇듯이 그 좌충우돌 난리법석 가운데에는 진주가 숨어 있다. 새삼 연애라는 것,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의 모든 일은 ‘시라노 에이전시’가 벌인다. 한 궁색한 지하 연극연습실을 사무실로 쓰고 있는 이 회사는 기존 중매 알선업체를 확장한 것이다. 단, 중매는 결코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의뢰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여인 혹은 남자의 사랑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정교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 회사는 의뢰인의 상대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뒷조사 요원부터 의뢰인의 의상과 제스처 등 스타일 모두를 책임지는 인력, 또 그 의뢰인이 쳐야 할 대사 하나하나를 작성해 주는 작가와 그리고 이들 모두를 총괄하는 감독 혹은 연출자까지 모두 4명으로 구성돼 있다. 다들 연애라면, 혀를 내두르는 전문가 솜씨를 지녔다. 이들이 성사율 100%를 자랑하는 것은 치밀한 연출 솜씨 덕분이며 그 모든 것은 이들이 한때는 극단 단원이었기 때문이고, 그것도 메인 연극이 ‘시라노’였기 때문이다.
내용으로도 알 수 있듯이 김현석의 이번 영화는 1990년 제라르 뒤 파르디유가 나왔던 ‘시라노’에서 착안된 영화다. 물론 1897년에 나온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벨주락’에 더 기대고 있는 작품이다. 연극에서 시라노는 자신의 사촌인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록산느라는 여인에게 절절한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는 남자다. 하지만 이미 그는 록산느를 더 사랑하고 있는 처지다. 김현석의 영화 속 ‘시라노 에이전시’의 총감독 병훈(엄태웅)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그에게 찾아 온 의뢰인 상용(최다니엘)은 희중(이민정)이라는 여인이 자신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병훈은 희중과 이미 프랑스 유학시절 깊은 사랑과 실연을 겪었던 사이다.
하지만 시라노라고 해서 다 같은 시라노가 아니다. 사랑은 늘 같으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끊임없이 변주된다. 김현석의 ‘시라노’가 기존의 영화 ‘시라노’나 혹은 숱하게 무대에 오른 연극 ‘시라노’와 큰 차별성을 보이는 것은 같은 사랑의 얘기를 시대의 논리와 감성에 맞게 재창조해 냈기 때문이다.
병훈은 상용과 희중의 연이 맺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 시라노와 같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려 한다. 거기까지라면 원작 ‘시라노’와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김현석 감독은 원작의 시라노-크리스티앙의 관계를 병훈-상용의 관계에서 그 주종의 느낌을 살짝 뒤집는다. 원작에서 크리스티앙은 시라노의 대필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지만 영화의 상용은 보다 주체적이다. 영화 후반부쯤 에이전시의 연출에 따르지 않고 상용 스스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어느 시대 어느 젊은이들이라도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다.
김현석은 늘 주변의 사랑을 택한다. ‘광식의 동생 광태’에서의 광식(김주혁)이나 ‘스카우트’의 주인공 이호창(임창정)도 모두 사랑의 주변에서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맨다. 이들 못난 사람의 미학은 진정성이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은 마음이라도 진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현석의 영화에서 늘 진심이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오동진<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