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아침] 시인과 총장

입력 2010-09-29 17:43


시인과 총장. 이는 얼마나 상치되는 이미지의 결합인가. 단 한 가지 공유할 게 있다면 대학과 시에는 허구, 즉 끊임없는 상상력을 필수로 한다는 것이다.

총장이 되면 내 뜻과는 상관없이 수많은 초대에 응해야 한다. 먼 곳을 차로 가고 오는 시간이 나에겐 사유의 시간이 된다.

동문 교회 행사에 축사하러 서산까지 가야 할 때였다. 안성 못 미쳐서부터 눈같이 흰 꽃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제주도 유채꽃 들판과는 또 다른 황홀경이었다.

멀리서 본 배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길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배꽃을 향해 흙길로 차를 몰았다. 수만 평 배꽃 과수원 옆에다 차를 대고 나는 오랜만에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 세상엔 배꽃만 있는 듯 싶었다.

흰 눈보다 약간 연둣빛이 감도는 아주 황홀한 꽃 들판이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배꽃 구경을 하다가 트래픽에 걸려서 그날 축사를 못하게 되었다. 그 후유증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전부터도 나는 좋은 곳을 만나면 수없이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산청에 갔을 때도 그랬고 함평, 장수, 장성, 변산반도, 벌교에서도 그랬다.

이렇게 길이라도 가끔 잃지 않으면 나는 총장이면서 시인인 내가 시를 시로 지킬 수 없다.

김광규 시인이 쓴 ‘늙은 마르크스’라는 시에서 “여보게 젊은 친구/마음이 먼저 굳어지지 않도록/조심하게”라는 시 구절은 총장을 하면서 귀에 쟁쟁거리며 잊혀지지 않는다.



시인 총장이 느끼는 확실한 또 하나의 현실은 ‘대중 속의 적막’이다. 적막의 사전적 의미는 고요하고 쓸쓸함인데, 이 고요함은 내게는 소리의 고유함이 아니라 소음 속에서 느끼는 고요함이다. 고요와 동반하고 있는 것은 쓸쓸함이며, 이 쓸쓸함은 고요가 곁들이는 감정이게 마련이다. 총장에게 인기척은 소음에 가까울수록 많지만 시인이 느끼는 것은 고요이며 쓸쓸함이다. 그러나 이 적막의 시공 속에서 나는 오히려 나로 몰입될 수 있다. 세속의 시선 속에서 신도 외로운 존재이듯이 작품을 쓰는 순간과, 총장의 ‘적막의 시간’은 오히려 창조의 시간이다.

새벽이 되면 총장은 다시 적막의 표정과 다르게 쓸쓸함을 가지고 만개한 업무가 기다리는 대학으로 출근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공사와 시방서를 눈여겨보며 결재해야 하고 깨알 같은 통계의 숫자 그 아귀가 맞는지 체크해야 하며 안티 교수의 질문과 친절한 직원의 배후에 대하여도 생각해야 한다. 더구나 발전기금, 등록금 협의, 교수협의회, 노동조합, 대학평의회, 수십 개의 위원회, 거미망 같은 규정들…. 무수한 질문에 총장은 답을 준비해야 한다.

시인이기만을 원했던 나였는데 총장 업무를 보면서 나는 내가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나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새삼 깊게 감사하고 있다.

최문자 시인<협성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