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정승훈] 대통령의 꿈, 그리고 현실
입력 2010-09-29 17:49
2006년 11월 9일 일본의 쓰쿠바 과학도시를 방문했다. 제17대 대통령선거를 1년여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당시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권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을 동행취재하기 위해서였다. 1966년 건설이 시작됐던 쓰쿠바는 약 250여개의 공공·산업체 연구소가 집중돼 있어 세계적으로 이름난 과학도시다.
이 대통령은 ‘고에너지가속기연구소(KEK)’에 특히 많은 관심을 표시했다. 지하에 설치된 가속기를 직접 둘러보고 연구소 관계자들과 연구 현황, 성과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이 대통령은 “지금은 기초과학 연구도 분야별로 진행돼 완전히 새로운 연구결과를 내기 어렵다”며 “기초과학의 학제 간 연구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행한 관계자들과 취재기자들에게 “대한민국이 10년, 20년 후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서는 기초과학 연구에 따른 원천기술 개발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그의 모습은 흥분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어린 시절 꿈꿨던 장소에 서 있는 듯했다.
일본 방문에 앞서 이 대통령은 스위스 제네바의 유럽핵입자물리학연구소(CERN)와 독일 GSI연구소 등도 방문했다. 이 대통령은 “성장의 동력을 기초과학으로 확대해야 할 때가 왔다”며 과학비즈니스 신도시 건설을 강조했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2가지 공약으로 꼽혔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은 당시 그 기초가 다져졌다.
정부는 지난해 1월 신성장동력사업을 선정하면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추진을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했다. 이 대통령의 꿈이 구체화된 셈이다. 기초과학원 설립과 중이온 가속기 설치 등으로 기초과학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만들고, 미래 신산업을 창출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과학계에서는 과거 대덕연구단지 조성 때보다도 더 야심 찬 계획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추진은 2년째 제자리걸음 중이다. 지난해 2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특별법’이 국회에 제출됐으나 세종시 문제와 얽혀 처리되지 못했다. 부지 선정도 지역 이해관계에 휘말리면서 혼선을 빚고 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대한민국이 제2의 도약을 하기 위해선 기초과학 진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주춧돌을 자신이 놓는 모습을 꿈꿨지만 그의 꿈은 현재로선 요원해 보인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지난 10일 대통령직속 심의기구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장관급 행정위원회로 바꾸는 방안을 확정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연간 14조원에 이르는 연구개발(R&D) 예산의 편성·조정권을 갖는, 직원 150명 규모의 상설기구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위원회라는 형식이 국가 100년 대계를 마련하는 일을 하기에 적당한 것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당장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만 해도 엄청난 비용과 장기간의 투자, 복잡다단한 중재 과정이 필요한 일이다. 지역으로, 학계로, 국회로 뛰어다니며 의견을 조율해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 앉아서 결정할 사람이 아니라 이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했던 ‘일꾼’이 필요한 것이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이 지난 22일 CERN을 방문, 한국과 CERN의 협력증진 및 중이온 가속기 등과 관련한 협력방안을 논의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장관이 대통령의 측근인 만큼 CERN 방문에 대통령의 뜻이 담겨있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의 역할이 너무나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교육과 관련한 현안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이 장관이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추진을 진두지휘할 만한 여건이 아니다. 교육과학기술부 내에 추진단이 구성돼 있지만 장관이 직접 나서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이 대통령은 2012년까지 우리나라를 과학기술 7대 강국으로 세우겠다는 청사진을 내걸었다. 그 청사진의 핵심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이었다. 임기는 절반을 넘어섰다. 대통령이 꿈꿨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조직도, 사람도 부족해 보인다. 의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승훈 정치부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