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안교회서 봉사 이근영씨 “경기보다 예배 통역때 더 땀나요”
입력 2010-09-29 17:33
이근영(29)씨는 서울 신문로 1가 새문안교회(이수영 목사)에서 3년째 2부 예배 동시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말(영어)을 잘 통하게 한다고 해서 ‘말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토익 만점(990점)을 맞아 ‘토종 영어 달인’으로 통한다. 2008년부터 1년 동안 프로농구에 푹 빠져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농구단에서 용병들의 통역사로도 활동했다. 감독과 코치의 총알 같은 지시를 용병들에게 단 몇 초 동안 정확하게 전해야 하는 역할이다. 그야말로 초 싸움, 피 말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 이씨는 농구장에 있을 때보다 더 긴장된 생활을 하고 있다.
숨 막히는 농구 시합과 설교 말씀 통역 중 어느 것이 쉬울까. 지난 주말 새문안교회에서 이씨를 만났다. 그는 인사를 나누자마자 “농구 코트에서 사활을 건 승부의 작전을 중계하는 것보다 목사님 설교 말씀을 통역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털어 놓았다. 지난 12일(주일) 이수영 목사의 설교를 예로 들었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얼마 전 ‘우주는 신이 만든 것이 아니다’는 주장에 대한 이 목사의 비판이었다. 호킹 박사는 이 목사가 설교하기 하루 전 CNN래리킹 라이브쇼에서 ‘신학이란 건 불필요하다. 중력과 양자이론이 무(無)로부터 우주를 생성시켰다. 따라서 신은 없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펴 기독교계에 파문을 던졌다.
“이 목사님은 호킹이 ‘신이 없다’고 한 것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문제이며 그는 뛰어난 과학자이겠지만 과학이 답할 수 없는 문제에 답하는 오류를, 아니 그것은 오만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순간 당황했지만 목사님의 말씀은 분명했어요. ‘오만한(arrogant) 것’이라는 메시지였지요.”
하지만 이씨는 그날 예배 통역을 제대로 했는지 최근까지 고민했다고 털어 놓았다. “앞으로 과학의 영역에서 창조론을 100% 자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신이 없다는 주장이 오만하지 않게 되는 걸까? 그 시점에서는 기독교를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해야 되나?”
하도 답답해서 이씨는 CNN인터뷰 기사 전체를 봤다고 했다. 이씨에 따르면 호킹 박사는 인터뷰에서 우주 생성의 원리가 과학적 원리로 완전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완전 부정은 아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이 목사의 설교를 통역하면서 비로소 대학시절부터 완전하게 풀지 못했던 숙제를 명쾌하게 풀었다고 밝혔다. 그는 과학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술(記述)들과 합치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특히 과학과 기독교가 한 점에서 만나 충돌을 일으킬 때, 그 현상을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이씨는 결국 보다 더 세련된 과학의 발달이 과학자들을 종교로부터 이탈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석처럼 그들을 종교로 이끌어가는 기제(사랑)가 될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두 영역은 영원한 평행선이 아니라 한 줄로 포개어지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씨는 앞으로도 과학을 더 깊게 공부할 계획이지만 더 이상 과학과 기독교라는 영역에서 엉거주춤하지 않을 작정이다. 과학의 영역으로 창조론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 위주의 교육을 받았다. 공부를 안 하거나 못해서 혼이 난 적은 없지만, 교회학교를 가지 않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아버지 이승희(65) 집사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것 외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별로 없다. 뒤늦게 신학(장신대)을 공부한 어머니 김화순(60)권사에게서 만학의 열정을 배웠다고 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모비스 사령탑이자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유재학 감독이다. 유 감독의 모교인 경복고에 들어간 것이 이씨의 인생과 운명을 바꿔 놓았다. 영어와 물리를 좋아했지만 석유탐사 전문가가 되기 위해 연세대 화학과에 들어갔다. 영어 실력은 대학 다닐 때 ‘AP뉴스 듣기’ 영어 동아리에서 다졌다. 1주일에 3일 동안 오전 7시30분이면 어김없이 모였다. 4학년 1학기까지 이어졌다. 그 덕에 카투사 배치시험에서 1등을 했고, AFN-KOREA 방송국에서 통역 병으로 근무했다. “3가지 종류의 영자신문을 크게 읽는 것이 효과적이었어요.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억양(높낮이)에 더 신경을 써서 읽었죠. CNN은 하루 6시간, 영자신문은 2시간 정도 꼬박꼬박 봤어요.”
그는 키(175㎝)가 별로 크지 않지만(외국에는 여행조차도 가보지 못했고 환경도 영어 학습에 유리하지 않았지만) 1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작은 키를 극복하고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농구선수들처럼 끊임없이 자리싸움을 했다. 그때 매일 써둔 서툰 일기가 지난 봄 ‘영어 3단어면 말이 통한다’는 책으로 나왔다.
“리바운드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농구선수가 키만 크면 무조건 쉽게 리바운드를 잡을 기회를 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씨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NBA MVP를 거머쥔 아이버슨이라는 농구 선수가 우승 직후 가진 인터뷰 중 던진 말을 소개했다.
“We knew everybody was saying we could not win because of our size. But it is not about the size of the player. It’s about the size of your heart(사람들이 우리가 키가 작기 때문에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농구는 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하는 거라고요).”
이씨는 요즘도 설교 원고가 나오는 토요일 저녁시간에는 번역하느라 여념이 없다. 완벽하게 준비해도 막상 주일 예배가 시작되면 아직도 초긴장상태를 벗어날 수 없단다. 그는 서른의 나이에 접어들면 미국 유학길에 오를 계획이다. 전공을 살려 석유자원 탐사전문가가 되는 것이 1차 목표다. ‘엑손모빌’에 들어가 최고 책임자가 되는 것이 그의 원대한 꿈이다. 이씨가 건넨 명함에는 아주 소중한 비밀이 숨어 있었다. “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 Dreams will come true(지식보다 상상력이 더욱 중요하다. 꿈은 이루어진다).”
글 윤중식 기자·사진 신웅수 대학생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