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송과 벗하며 짐꾼들 흔적 따라… 울진 ‘십이령 바지게길’ 트레킹

입력 2010-09-29 17:29


금강송 숲길인 ‘십이령 바지게길’의 출발점은 경북 울진군 북면의 두천1리이다. 지금은 15채의 농가와 한 쌍의 장승이 마을을 지키는 한적한 산골이지만 해방 전만 해도 주막과 마방으로 제법 흥청거렸다. 100여년 전부터 바지게꾼으로 불리는 행상들이 봉화장에 가기 위해 하룻밤을 유숙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불영계곡을 관통하는 36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12고개를 넘는 십이령 바지게길은 울진과 봉화를 동서로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일제강점기 때 울진과 봉화의 장시를 장악했던 보부상조직이 퇴조하자 선질꾼 혹은 등금쟁이로 불리는 바지게꾼이 등장했다. 그들은 울진에서 바릿재∼샛재∼너삼밭재∼저진터재∼새넓재∼큰넓재∼고채비재∼맷재∼배나들재∼노룻재를 거쳐 봉화까지 130리 길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바지게꾼들은 울진장이나 죽변장, 흥부장에서 미역 소금 건어물 젓갈 등 해산물을 산더미처럼 짊어지고 와 두천리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산도적과 산짐승을 피하기 위해 20∼30명씩 무리를 지어 사흘 동안 산길을 걸어 봉화장으로 갔다. 봉화 등에서 해산물을 피륙 담배 인삼 곡물 등으로 물물교환한 바지게꾼들은 다시 울진으로 되돌아왔다. 지금은 모두 논밭으로 바뀌었지만 울진은 옛날에 염전이 30여개나 있던 소금 생산지.

돌다리가 놓인 두천리 개울가에는 울진내성행상불망비((蔚珍乃城行商不忘碑)가 서있다. 바지게꾼들의 우두머리인 접장 정한조와 반수 권재만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불망비는 무쇠로 만든 비석이다. 일제강점기 때 징발을 우려한 주민들이 비석을 땅에 묻었다가 해방 후 비각과 함께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림 같은 선녀폭포를 뒤로하고 옛길로 접어들면 두 번째 고개인 바릿재가 나온다. 인적 드문 곳이라 칡덩굴에 점령당한 오솔길은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이 역력하다. 다행히 고개는 가파르지 않다. 그러나 산더미처럼 짐을 진 바지게꾼들에게 바릿재는 삶의 무게 이상으로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고개였으리라.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은 언제가노/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가노/반평생을 넘던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서울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후렴)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바지게꾼들이 시름을 달래기 위해 부르던 ‘바지게꾼 노래’다. 바지게는 무거운 해산물을 지고 좁은 산길을 날렵하게 다니도록 지게다리를 없앤 지게를 말한다. 그들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를 때도 서서 쉬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 ‘선질꾼’이다.

옛길을 따라 만들어진 임도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을 뿐 아니라 옆으로 계곡물이 흘러 풍광이 수려하다. 나무터널로 이루어진 임도 좌우의 가파른 돌산은 산양 서식지. 장평에서 1시간30분 쯤 걸으면 두천1리에서 6.5㎞ 떨어진 찬물내기쉼터에 이른다. 그러나 찬물내기쉼터에서 임도를 벗어나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면 소광2리까지 옛길의 흔적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찬물내기는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차가워서 부르는 말.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고 가파른 십이령 바지게길은 세 번째 고개인 샛재(조령)를 힘겹게 오른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울창한 숲길은 금세 조령성황사가 위치한 고갯마루에 닿는다. 바지게꾼들이 잠시 다리쉼을 하며 무사왕래를 기원하던 곳이다.

조령성황사에서 황장봉계표석까지는 줄곧 내리막길. 성황사 아래에 위치한 숲은 주막촌이 있던 곳으로 구들장과 녹슨 가마솥이 숲 속을 뒹굴고 있다. 한때 봉놋방을 가진 큰 주막이었으나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이후 화전민 마을과 함께 철거되었다. 바위에 구멍을 뚫고 세워놓은 석비와 마귀할멈의 전설이 전해오는 말무덤, 그리고 통나무로 만든 오솔길을 내려오면 소광리 금강송숲으로 가는 임도와 만난다.

아름드리 금강송이 울창한 십이령 바지게길은 희귀식물과 야생화들의 보고. 대광천을 따라 임도로 접어들면 너삼밭이 나온다. 고삼으로도 불리는 너삼은 성분이 인삼과 비슷해 한약재로 쓰였으나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바지게꾼들은 너삼밭재 입구에서 지게에 지고 다니던 옹기솥으로 밥을 해먹고 네 번째 고개인 너삼밭재를 올랐다.

지금은 흔적뿐이지만 화전민들이 살았던 저진터를 지나 다섯 번째 고개인 저진터재를 넘으면 홈달이라고 불리는 소광2리다. 폐교된 소광초등학교를 개조해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금강송펜션이 나그네를 맞지만 옛날 이곳은 바지게꾼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울진에서 봉화를 거쳐 다시 울진으로 돌아오기까지 열흘 이상이 걸리던 애환의 길. 십이령 바지게길의 나머지 구간은 아직도 짙은 숲 속에서 햇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울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