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사용설명서' 펴낸 충정교회 옥성석 목사 인터뷰
입력 2010-09-29 14:03
“아이폰4의 무한한 기능 중 몇 개만 숙지해도 ‘손 안에 든 컴퓨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능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핸드폰밖에 될 수 없는 겁니다.”
경기도 고양 충정교회 옥성석(57) 목사는 믿음을 최신 스마트폰에 비유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이란 귀한 선물을 주셨다. 그런데 사용법을 모른다. 그래서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없다는 요지다. 스마트폰 기능 익히기에 한창인 자신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을 보며 ‘믿음 사용설명서’(국제제자훈련원)란 책을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이 책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경주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선두 주자인 아벨부터 최후 주자인 라합까지 10여명의 절절한 신앙 스토리를 기록했다. 한 편 한 편에 믿음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고민이 깊이 배어 있다.
옥 목사는 1989년, 당시 서울 서대문에 있었던 충정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36세 젊은 목사가 40년 역사의 전통 교회를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무려 10년 가까이 젊음과 열정을 다 쏟아 씨를 뿌렸으나 기대했던 열매는 맺히지 않았다. 낙심 중에 강대상에서 밤을 지새우던 어느날 밤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란 음성이 확성기처럼 귓전을 때렸다. 급히 성경을 펼쳐 마태복음부터 시작해 요한계시록까지 ‘믿음’이란 단어를 모조리 찾았다.”
신약성경에서만 ‘믿음’이란 단어가 491번이나 나왔다. 심지어 ‘행함’을 강조한다는 야고보서에서조차 제일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믿음이란 사실도 발견했다. 믿음이 명사형에서 동사형으로, 바울 서신에서는 ‘충성’이란 의미로 사용된 것도 확인했다. 그의 ‘믿음에 대한 연구 결과’는 이렇다. ‘참된 믿음은 그저 바라만 보고 마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입술의 고백도 아니다. 내가 믿는 바를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행동에 옮기되 충성스럽게 실천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믿음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2000년 4월, 충정교회가 서울에서 일산으로 이전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당시 일산에는 이미 교회가 포화상태였다. 이 때문에 교회 이전을 말리는 동료 목사들도 많았다. 하지만 옥 목사는 결국 이전을 실행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이전 당시만 해도 장년 재적 180명이던 교회가 지금은 장년만 3000여명의 교회로 성장했다. ‘더 이상 성장이 없다’는 2000년대라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놀라운 성장인 셈이다. 하지만 옥 목사는 “성도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전을 반대하거나 중도 탈락자 없이 신앙을 이어오고 있다”며 “이것이야말로 당시 결정이 욕망의 결단이 아닌 믿음의 결단임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것은 믿음과 욕망을 혼돈 하는 크리스천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열매로 나무를 구분하듯 최종 결과가 믿음이었는지 욕망이었는지를 말해 줄 거란 얘기다.
우리는 지금 불확실성의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믿는 자들마저 안개 속 같은 현실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어디를 의지하고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진정한 나침반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게 옥 목사의 주장이다. 믿음을 붙잡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주장이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나침반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옥 목사의 인터뷰 전문.
-‘믿음 사용설명서’는 어떤 책인가.
아이폰4 등 스마트폰 열풍이다. 그 안엔 무한한 어플이 있다. 그 중에서 몇 개만 다운받아서 사용해도 ‘손안에 든 컴퓨터’라 할 정도로 기능이 다양하다. 그런데 사용법을 잘 모르니까 그냥 핸드폰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몰라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믿음 사용설명서’는 여기에 착안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뤘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봤다. 심혈을 기울였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믿음이란 단어가 어떻게 쓰여지고 있나를 관심 갖고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스터디를 했다. 신약에만 믿음이란 단어가 491번 등장한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등 복음서에서 믿음은 주로 명사형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 동사형으로 바뀌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서신서로 넘어가면서 믿음은 충성, 헌신 단계까지 발전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될 수 없다. 입술로 말하는 고백적 믿음도 주님이 전적으로 기뻐하시지 않는다. 참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내가 믿는 바를 고백하는 단계를 넘어 그 믿음을 내 삶에서 드러내고 행동으로 옮기는, 헌신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선진들은 행동하는, 자신의 믿는 바를 드러내는 삶이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었다.
-믿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믿음은 역사(役事)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에 잘 나와 있다.
-그 믿음이 목사님의 삶 속에서는 어떻게 역사하고 있나.
목회자들에겐 설교와 삶이 일치하느냐가 중요하다. 제가 걸어온 삶의 여정에서 그런 노력을 많이 했다. 충정교회는 원래 서울 충정로에 있었다. 교회 이름도 거기서 나왔다. 1989년에 부임했을 때 교회가 무척 어려웠다. 부임 후 7년 동안 고군분투했지만 교회는 완전 침체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믿음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믿음은 곧 행동하는 것임을 그때 결론내렸다. 충정로에서 일산으로 옮길 수 있는 확신도 그때 주신 것이다. 함께 했던 가족이나 성도들도 “이 일은 믿음의 결과”라고 할 정도로 교회 이전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제 나름대로 믿는 바를 목회 현장에서 실천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 따르는 열매를 주시지 않았나 생각한다.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게 믿음이 아닌 경우도 있다. 자기 암시나 자기 노력의 경우다.
그런 경우가 많다. 믿음이냐 아니냐는 기준선은 굉장히 애매모호하다. 자기성취를 믿음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고 했듯이 결국 나타난 결과로 믿음의 옥석을 가릴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한국 교회의 위기도 결국 믿음의 문제가 아닐까.
믿음과 욕망이 혼재된 경우가 굉장히 많다. 목회자의 경우는 자기성취나 자아실현이 자주 믿음으로 포장돼 외쳐지기도 한다. 목회자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고 자기를 부인하는 진지한 작업들이 많이 이뤄져야 할 때라고 본다. 저도 물론 마찬가지다.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왜곡해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있을 거라고 본다. 성도들도 성경 속에 나타나는 사건들을 현실에 적용할 때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본다. 자칫 잘못하면 기복적인 형태나 비신앙적인 형태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 충정로에서 일산으로 충정교회가 이전했는데, 그 믿음의 결단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단하나?
그 당시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는 결과로 결국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당시 교회가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아마 지금은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목사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성도를 통해서도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교회 이전 과정에서 단 한사람도 반대하는 성도가 없었다. 180여명의 성도들이 다 이전한 교회를 출석했다. 이전 후 충정교회는 계속 연착륙했다. 지금은 장년만 2500~3000명이다. 학생들까지 합치면 4500명에 이른다. 2000년 이전 당시, 일산은 이미 다른 교회들이 다 셋업돼 있었다. 주위에서는 ‘당신은 너무 늦게 들어왔다’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하나님 은혜로 성장했다. 더군다나 ‘성장이 없는 때’라고 하는 2000년대에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당시 결정은 믿음과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충정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한마디로 열린 교회다. 먼저 있던 분들은 기득권을 완전히 내려놓고, 새로 들어온 분들은 주인 의식을 갖고 잘 섬기고 계시다. 제가 보기에 우리 교회는 자기 기득권을 주장하는 성도들이 없다. 다들 섬기는 데 열중한다. 비록 65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어디에 가서도 ‘열린 교회’라는고 소개할 수 있다.
-부산 온천제일교회와 서울 사랑의교회에서 부교역자를 16년간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16년이 저에게는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온천제일교회는 굉장히 전통적이지만 사랑의교회는 현대적인 교회다. 양극의 경험은 충정교회를 섬기는 데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충정교회엔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았다. 어린 목사로서 그런 분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장차남 목사님에게서 배웠다.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고 도전하는 것은 고 옥한흠 목사님에게서 배웠다. 특히 옥 목사님은 이 부분에 있어 저를 맹훈련시키셨다. 사랑의교회에서 내가 한 일은 3년간 옥 목사님의 설교를 요약해서 주보에 게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원고를 저에게 주시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주일예배를 1~3부까지 다 참석해야 했다. 옥 목사님의 네임 밸류가 있기에 원고 정리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릎을 치거나 눈물을 훔칠 때가 많았다. 가족이나 친척의 설교에서 은혜받기가 제일 힘들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사촌형의 설교는 어느 누구보다 깊은 감동을 줬다. 그래서인지 어떤 분들은 내 설교 들으면 옥 목사님이 떠오를 때가 있다고 한다.
-부교역자 사역 기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나?
부교역자 기간이 길어지면 샐러리맨화 할 가능성이 많다. 생활 때문에 목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이도 중요하다.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까지 하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36세 때 전통적인 교회의 담임으로 왔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온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좀 더 잘 다듬어졌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있다. 부교역자 과정을 인턴십이라고 한다면 좋은 교회, 좋은 목회자 밑에서 거치는 게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20년 이상 부교역자를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 생활에 젖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은 될지 모르겠지만 목회자가 생활을 위해 목회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소명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나의 양떼’와 함께 울며 웃으면서 목회하는 것도 필요하다.
-충정교회는 어떻게 부임하시게 됐나.
난 한번도 충정교회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옥한흠 목사님도 이미 저를 다른 교회에 보낼 계획을 갖고 계셨다. 그런데 수요일 저녁예배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충정교회를 갔는데 ‘서울에 이런 교회가 있었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낙후되고, 성도들은 힘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게 오히려 저에게 도전이 된 것 같다. ‘이런 교회를 일으킨다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겠구나.’
-사촌형인 옥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어떤 분이었나?
난 어릴 적 거제도 삼거리교회 주일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형님(옥한흠 목사)이 당시 해군사관학교 지원했다가 낙방하고서 전도사 비슷하게 우리 교회 주일학교에서 설교를 했다. 워낙 성경을 많이 읽으시니까 목회자 두긴 어렵고 하니까 주일학교 설교하면서 지원도 받고 했던 것 같다. 그때 이후로 형님은 저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다. 80년대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이 처음 나왔을 때, 김해 무척산기도원 정상에 형님과 같이 올랐다. 난 그때 고신대 대학원생이었다. 내 시각으로 그 책은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형님이 꼭 이단처럼 여겨졌다. 거기서 형님과 단판 승부를 벌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견해를 얘기했더니 형님이 “그래? 조금 더 생각해봐”라고 얘기했다. 좀 더 세게 얘기했지만 그래도 형님은 “한번 더 생각해봐”라고 했다. 그만큼 부드럽고 아주 소탈하셨던 것 같다. 형님의 그런 감화가 내 목회관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옥 목사님 유산 중에서 가장 많이 배워야 할 점은?
형님은 참 정직하셨다. 세속적 욕망이나 감투에 초월한 분이셨다.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시는 분이었다. ‘사랑의교회 옥한흠’ 하면 제자훈련을 얘기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그 분은 설교에 목숨을 건 분이었다. 사랑의교회 1~3부 예배를 다 참석했기에 잘 안다. 그 사이에 그분의 설교는 계속 달라졌다. 쉬는 시간에도 자신의 설교를 놓고 고민을 하셨던 것이다. 그분의 설교를 들으며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남편 설교할 때 아내가 은혜 못받지 않나. 그런데 형님의 설교를 들으며 울었던 기억이 많다.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형님의 삶이 설교 속애 용해돼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성격이나 자질은 형님과 다르지만 그 정신을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목회자로 기억되고 싶나?
하나님을 사랑했던 목회자, 성도들을 사랑했던 목회자로 기억되고 싶다. 그래서 성경을 사랑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있다. 설교 준비하면서 내 얘기가 아닌 ‘이 말씀 통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시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늘 고민한다.
글.사진=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