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황주리] 어느 추석날의 추억

입력 2010-09-28 17:57


어릴 적, 추석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나면, 아버지는 육이오 동란 때 아버지 대신 전쟁에 나가 행방불명된 삼촌 이야기를 해주셨다. 백화 수복 한 잔이라도 들어가면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희들 삼촌 만성이는 참 착하고 잘생겼더니라.”

나는 삼촌 이름이 ‘황만성’이라는 것과,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과, 그 무서운 육이오 전쟁이 우리 가족사에 남긴 상처에 관해 듣고 또 들었다. 아무리 다시 들어도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아직도 사진 속에서 본 영원히 늙지 않는 삼촌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을까. 팔십이 된 국군 포로 한 분이 중국으로 탈북을 시도했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삼촌이 아닐 줄 알면서도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정말 삼촌이라면 어쩔 건데? 집으로 모시고라도 오려고?” 나는 맘속으로 이렇게 답했다. “그렇고 말구요, 살아생전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어 하던 삼촌인데요.” 어릴 적 보름달 뜨는 한옥 마당에 앉아 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삼촌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삼촌이 죽어 저 보름달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하곤 했다.

세월은 자꾸만 흘러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다. 어느 해인가 추석날 성묘를 가서 아버지 무덤 앞에 앉으니, 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무덤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갑자기 아버지가 고추잠자리로 환생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참 동안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동식물이 아버지의 환생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에 시달렸다. 길가의 코스모스라도 좋고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노랑나비라도 좋으니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었다.

뉴욕에서 살던 십여 년 동안, 추석이면 나는 맨해튼 32번가의 한인 타운에 있는 한국 식품가게에 가서 차례를 지낼 먹을거리를 샀다. 생선전이랑 동그랑땡이랑 빈대떡이랑 고사리나물이랑, 이십 년 전에도 뉴욕의 한인 타운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음식을 차려놓고 혼자 조용히 차례를 지내며 아버지와 삼촌의 평안함을 기도했다. 추석이면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내가 살던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월드트레이드센터 안으로 들어가 지하철을 타고 시내에 나가 하루 종일 영화를 보았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그 당시 뉴욕 영화관의 메뉴는 하도 많아서 매일 몇 개씩을 보아도 바닥이 나지 않았다. 외로웠던 그 시절, 극장은 나의 천국이었다. 월드트레이드센터가 거짓말처럼 쓰러지던 날도 추석 무렵이었다. 이후 나는 나의 모든 짐을 한국으로 보냈다.

지난 추석날, 나는 뉴욕에서 보낸 서른 살의 추석을 돌이켜보았다. 혼자 초라한 음식들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내던 90년대의 추석들, 꿈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은 아버지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진 속 삼촌을 기리며 보냈던 나만의 추석이 그리워졌다. 거짓말처럼 이십 여년이 훌쩍 흘러간 지금은 2010년 가을이다.

황주리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