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건설될 하나님 나라..그리스도인들의 행동강령은?
입력 2010-09-28 10:58
[미션라이프] 내일의 눈으로 오늘을 본다면? 아마 마음속 각오의 강도가 다소 올라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범위를 넓혀 20~30년 후의 눈으로 2010년을 본다면 어떨까. ‘선택과 집중’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봄의 눈으로 차디찬 겨울을 바라보고, 통일의 눈으로 분단의 현실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절망보다는 희망에 훌쩍 다가가 있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지금을 본다면 어떨까.
톰 라이트(영국 세인트앤드류스대 신약학 교수)는 최근 번역된 ‘모든 사람을 위한 마태복음’(IVP)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도전을 던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 현실 보기, 그것은 곧 미래의 방식으로 현재를 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 소개된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IVP)에서도 이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천국은 우리가 가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이 이 땅의 우리에게로 내려온다. 이 같은 ‘하나님 나라’ 해석은 온갖 종류의 이원론에 대한 분명한 거절이다.”
그는 하나님(하늘) 나라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하늘나라는 사후에 가는 어떤 곳이 아니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모든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악과 부패와 죽음 자체가 없는 새생명의 상태에 이르게 하기 위해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구원하시는 통치다.”
그의 ‘마태복음’은 이같은 ‘혁명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강령인 셈이다.
우선 그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이 땅에 침입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세례는 그 하나님 나라 건설의 본격적인 신호탄이다.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자신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정복을 준비한다는 표시로 그들은 그 강을 건너야 했다는 게 라이트의 설명이다. 이것은 애굽을 탈출하기 위해 홍해 도해(渡海)를 감행했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닮았다.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남은 출애굽 사건처럼 라이트는 세례 요한의 세례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의 ‘팔복’ 가르침은 얼핏 이 세상의 방식과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합리적이지도 않아 보인다. 라이트는 “팔복은 미래의 눈으로 볼 때에만 이해가 되는 대목”이라고 말한다. 그 미래는 나사렛 예수를 통해 현재에 도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팔복이야말로 올바로 된 것이라고 대담무쌍하게 믿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역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삶의 목표로 갖고 살아야 할 것을 도전한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그 과정에서 저절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현대 문화는 끊임없이 어린이나 장애인, 만성질환자, 노인, 난민, 여성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걸러내려고 한다. 예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이야말로 수호천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뵐 만큼 존귀한 자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부끄러워하고 얼굴을 돌린다. 라이트는 그 이유를 “우리가 하나님께 등을 돌린 증거”라고 설명한다.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으려는 ‘손’을 잘라버리는 것, 무료 급식 봉사에 가지 않으려는 ‘발’을 잘라버리는 것, 우리 사방에 있는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는 ‘눈’을 뽑아버리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는 습관과 태도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만큼 가난한 자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 이보다 더 강력한 도전을 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라이트는 또한 인자(예수님)의 오심을 정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인류의 가장 깊은 염원 중 하나가 정의다. 정의란 단순히 악한 자를 벌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세상의 균형을 회복시킨다는 뜻이다. 인자가 오실 때 마침내 정의는 시행될 것이다(마 25:31~46).
하지만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어 정의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수단으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수단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악을, 이 세상의 증오와 잔인함과 조롱과 폭력과 협박을 가장 가혹한 방법으로 다 받으셨다. 라이트는 “이런 예수님에 대해 어느 누가 기독교 신앙이 비현실적이고 내적인 체험일 뿐 현실 세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가”라고 되묻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뜬구름 잡는 사후(死後)의 세계가 아니라 이 땅 가운데 이뤄지는 가장 현실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 부패와 온갖 종류의 악이 지배하는 모든 주어진 상황에서 시작해 사랑의 통치를 점점 확장시켜 나가신다. 그 일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맡겨졌다. 따라서 위임받은 사람들이 하는 만큼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게 돼 있다.
물론 거센 반론도 있다. 하나님 나라를 떠맡기에 교회는 너무나 많은 잘못을 했고, 교회는 지금 희망이 아닌 절망의 대상이 돼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말한다. 마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할 책임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거기엔 선택이나 머뭇거릴 여지가 없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