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조용한 실험… 우발적 가족해체 막는다

입력 2010-09-27 18:21


결혼 5년차 부부인 강모(37)씨와 이모(29·여)씨는 지난 7월 이혼을 위해 서울북부지방법원을 찾았다. 장남인 강씨와 워킹맘 이씨 사이에는 두 살 된 딸이 있었지만 이씨와 시댁과의 불화로 불거진 갈등의 골은 이미 깊어진 상태였다. 이씨는 “시댁과 남편이 나를 왕따시킨다. 이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며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서류 한 장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던 이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자녀가 미취학아동이면 상담을 받도록 한 규정 때문이었다.

강씨 부부는 법원이 지정한 상담위원과 딸의 양육문제를 의논하던 중 딸의 미래에 대해 “전혀 고려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특히 “아이는 밥을 먹고 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온기와 감동을 먹고 크는 것”이란 상담위원의 말은 강씨 부부가 이혼을 취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강씨 부부는 “한부모 아래서 클 딸이 눈에 밟혀 마음을 고쳐먹었다. 서로의 엉킨 마음을 풀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노력하겠다”며 법원 문을 나섰다.

서울북부지법이 전국 최초로 지난 7월부터 미취학아동을 가진 이혼결심 부부에게 실시하고 있는 ‘양육 및 이혼상담제도’가 조용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어린 자녀를 두고 이뤄지는 ‘될 대로 돼라’는 식의 이혼을 막기 위해 ‘양육’에 초점을 두고 건강한 ‘한부모 가정’을 만들자는 것이 취지였지만 상담 과정에서 우발적인 이혼을 막는 부수적 효과가 나타났다. 올 들어 지난 6월까지 월 평균 10.5건에 그치던 상담건수는 제도가 시작된 7월부터 이달 16일까지 91건으로 크게 늘었다. 상담 후 그 자리에서 이혼을 취하하는 부부도 9쌍이나 됐다. 상담을 ‘권고’하는 데 그치던 지난 6월까지 법원 문을 들어선 부부의 이혼 취하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상담에 참여한 부부들의 만족도 또한 높았다. 상담을 받고 설문에 응한 부부 62쌍 중 56쌍(90%)은 “많은 도움이 됐다” “유익했다” 등의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3개월 된 아이를 안고 상담에 참여한 뒤 이혼 취하를 결심했다는 한 부부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상담위원이 인생의 선배로서 해주는 조언을 듣고 우리 부부가 얼마나 성급한 판단을 했는지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서울북부지법에서 협의이혼 재판을 담당하다 고심 끝에 제도 마련에 나선 민사1단독 변민선 판사와 김용두 판사는 “재판을 하면서 오로지 ‘헤어지는 게 목적’인 부부들을 많이 발견했다”며 “결손 가정을 방지하기 위해 법원이 후견인적 지위에서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북부지법은 앞으로 이 제도를 미취학아동 가정뿐 아니라 초·중·고교 자녀, 미성년자녀 가정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두 판사는 “앞으로 이혼 후 문제가 되는 양육비와 친권 등에 관한 매뉴얼을 만드는 등의 노력도 필요하다”며 “예산확보 같은 정부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수현 기자 siemp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