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남 강원대 명예교수 ‘플라토닉 러브’ 펴내
입력 2010-09-27 17:35
2400여년 전, 아테네에서 석수장이의 아들로 살아가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는 신탁을 듣게 된다. 신탁이라고 해봐야 무당이 점치는 일과 다를 바 없었지만, 고대 그리스인에게 신탁은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왜 내가 남들보다 현명한가’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소크라테스의 탐구는 그때부터였다.
조무남 강원대 명예교수가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생애를 담은 ‘플라토닉 러브’(럭스미디어)를 냈다. 지혜와 아름다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끝없는 탐구와 논리를 보여주는 책이지만, 그의 철학만을 따분하게 설명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당시 아테네의 정치 상황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생애까지 흥미진진하게 펼치는 종합교양서에 가깝다.
‘플라토닉 러브’란 무엇인가. 아고라로 나간 소크라테스는 지록위마(指鹿爲馬·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서 남을 속이려는 짓)의 궤변도 가능케 하는 수사학으로 무장한 소피스트들의 틈에서 사유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개념과 정의를 캐물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도록 깨우쳤다. 앎과 지혜에 대한 끝없는 탐구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점점 ‘지혜를 사랑하는’ 현인이 된다.
사랑의 신 에로스를 온갖 아름다운 형용사로 묘사하는 말을 들을 때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에로스는 아름다움 자체란 말인가, 아니면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존재인가.” 질문을 들은 아가톤이 얼떨결에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존재”라고 답하자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갈구한다는 것을 의미하네. 그리고 어느 누가 아름다움을 갈구한다는 것은 그가 아름다움을 가득히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세. 만약 그가 아름다움 자체라면 다시 아름다움을 더 욕심낼 수 있겠나?”(84쪽) 우리는 아름다움이나 지혜·용기 그 자체가 아닌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파함으로써,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에 다가갔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등장을 그린 에피소드가 자못 전설의 영역에 속해 있는데다, 그가 생전 단 한권의 책을 남기지 않은 탓도 있어서 일반인들에게 그는 신비스러운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플라토닉 러브’는 그를 둘러싼 신비를 한 꺼풀 벗겨내어 소크라테스 철학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진리에 대한 탐구가 결국 그로 하여금 독배를 마시게 한 사실, 제자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가 아테네 역사에 남긴 오명까지를 생각하면 우리는 위대한 인물의 숙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양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