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72)

입력 2010-09-27 09:41

秋夕談話

중학교 국어 참고서를 공동 집필하여 출간했다는 아무개가 와서 ‘느티나무 담소’를 나눈 추석 오후였다. 이 애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났다. 아무개의 어머니는 교회에 나오지도 않으면서 아들이 나를 찾아 올 때마다 손수 뜯어 말린 고사리를 보내신다. 동그란 고사리 뭉치는 보름달을 닮았다.

“목사님.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고 교수형, 즉 올가미에 목이 걸려 돌아가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개는 나를 스승쯤으로 생각한다. 우리끼리 그러는 거니까 ‘스승’이라는 단어에 걸리지 않아도 된다. 녀석이 춘천고등학교 2학년였을 때 일이다. ‘解憂齊’였던 내 서재에 그는 무려 7시간이나 무릎을 꺾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12시가 넘어서 귀가한 나를 보자마자 그는 말했다.

“목사님. 당신과 함께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 무렵 아무개는 나를 찾아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를 묻곤 했다. 그러는 그가 그 밤에 자신을 모두 던졌다. “당신과 함께 길을 가고 싶다”는 말은 그 뜻이다. 나는 즉시 그에게 ‘亞老’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자신을 던져버렸으므로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새로 얻은 게바처럼 말이다.

엊그제, 그가 내게 물었다. 예수의 처형도구가 십자가형틀이 아니라 올가미, 동그랗게 만들어진 끈이었다면 기독교가 어떻게 되었겠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숱한 십자가 이론은 사라지고 ‘끈’ 이론이거나, ‘동그라미’ 변증, ‘올가미’ 구원론 같은 게 생겼겠지.

말인즉슨, 추석은 끈이고 동그라미라는 거다. 아무개의 말은, 추석을 신학으로 말하자면 십자가 신학이 아니고 동그라미 신학이라는 거다. 그래서 달이 둥글다나?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세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