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35) 수돗가에서 발견된 문무대왕비편
입력 2010-09-26 20:31
지난해 9월 경북 경주시 동부동 한 주택 수돗가에서 시멘트에 묻혀 있던 돌덩어리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이를 유심히 살펴본 사람은 다름 아닌 수도 검침원이었답니다. 검침원은 돌덩어리의 돌출된 부분에서 글자 모양이 있는 것 같아 평소 친분이 있던 신라문화동인회 김윤근 부회장에게 제보하고 김 부회장은 이 사실을 즉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신고했지요.
현장조사 결과 이 돌덩어리는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년)의 비석 중 상단 부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문무왕비(文武王碑)는 문무왕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682년 지금의 경주 사천왕사 터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후기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1724∼1802)의 문집 ‘이계집(耳溪集)’에 1796년(정조 20년) 비편(碑片)이 발견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으나 1961년 경주 동부동에서 비석의 하단부가 발견돼 경주박물관에서 상설전시되고 있었죠. 검침원이 수돗가에서 발견한 상단부는 조각난 문무왕비편이 200년 만에 제모습을 찾았다는 점에서 고고학계를 들썩이게 했답니다. 그러나 앞면 가장자리 부분 등에 마모가 심하고 뒷면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탓인지 결에 따라 깨어져 있었지요.
경주박물관은 이 비석을 보존처리하기 위해 집주인과 협의를 진행했으나 “문무왕비편을 빨래판으로 썼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와 보상비 지급 문제 등 때문에 애를 먹다 지난 6월 7일 강제집행을 통해 인수하게 됐답니다. 당시 상황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빨래판 사용’은 잘못된 사실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3개월 동안 이물질 제거 및 비편 맞춤 등 복원과정을 거쳤다는군요.
태종무열왕 김춘추(604∼661)의 아들인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수한 임금으로 왕릉은 경북 월성군 봉길리 감포 앞바다 대왕암(사적 제158호)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문무왕릉비가 세워진 사천왕사는 문무왕이 삼국통일 후 최초로 건립한 사찰이며, 이 사찰이 위치한 낭산(狼山)이 문무왕이 화장된 곳이어서 비석을 이곳에 세운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지요.
그렇다면 문무왕비편 상단부는 어떻게 주택 수돗가에서 발견됐을까요.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관아가 있던 자리로 200년 전 비석을 발견, 이곳으로 옮겨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49년 전 하단부가 발견된 장소와는 100m 가량 떨어져 있는 곳이죠. 문무왕비편을 보관 중이던 관아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가로 변했고 비석도 주택가에 방치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문무왕비편에는 청나라 학자 유연정이 한국의 금석문을 모아 발간한 책 ‘해동금석원’에 기록된 것처럼 태종무열왕의 업적, 백제를 멸망시킨 과정, 문무왕이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유언 등이 적혀 있답니다. 200년 만에 발견된 문무왕비편이 11월 21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원효대사’ 특별전을 통해 공개되고 있습니다. 유물을 보면서 1500년 전 신라 강국의 면모를 되새기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