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0-09-26 17:43
(13) 바리새인의 정체
사람 사는 사회의 어느 조직에서든 가장 확실한 두 가지 아군이 있다. 기득권 세력과 가족을 중심한 혈연과 지연 집단이다. 물론 이 두 집단이 아군이 되는 데는 조건이 있다.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세력 흐름에 맞서지 말아야 한다. 유별나게 굴면 안 된다. 인간 삶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서로 작용하면서 현실적으로 형성된 현재 상황을 혁신하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 소명이니 사명이니 하늘의 뜻이니 하는 것들은 대단히 위험하다. 근원적인 진리와 연관된 이런 생각을 가지면 가장 확실한 두 아군과 충돌하게 된다. 충돌이 심해지면 피해 갈 수 없는 선택 앞에 서게 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막판에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예수의 길이 그랬다. 마가복음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소개한다. 1장 1절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미 있는 세력 구조에 충돌하리라는 느낌이 벌써 진하다. 예수님이 공적으로 사역을 시작할 때의 상황을 전하는 1장 14절은 또 어떤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말씀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도전이며 도발이다. 기득권자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그렇다.
예수님이 전한 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니까. 하나님 신앙의 중심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과 가까워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그저 원론일 뿐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갖고 있던 하나님 신앙은 인간 삶의 흐름에서 적절하게 수정된 형태였다. 변색되고 퇴색된 것이었다. 반면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복음은 원색이고 원형이었다. 이 둘이 맞서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충돌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바리새인은 예수를 죽이려 한다. 3장 6절의 보도다. 정치적 집단인 헤롯당과 손을 잡는다. 그들의 논리로만 따져도 신앙을 저버리는 것이다. 타협, 야합, 배교다. 가버나움이나 가버나움을 포함한 북부 지역인 갈릴리의 바리새인 집단만 아니라 이 집단의 총 중심지인 예루살렘 차원에서 예수를 추적하고,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 집단과 총체적이며 근원적으로 충돌한다. 3장 22절 이하에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귀신의 왕과 결탁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죄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이 정도면 이제 결별이다. 다시 화해할 가능성은 없다.
예수님은 더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는다. 7장 1절 이하에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다. 상황이 이렇다.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데 대한 계명을 갖고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한다. 어느 한 가지 주제에 연관된 상황을 예수님은 근원적인 문제로 끌고 들어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을 대립시킨다. 바리새인이 가르치는 신앙은 사람의 전통일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은 폐기처분하고 사람의 전통을 가르치고 있다. 바리새인의 가르침과 삶에서 어느 하나 또는 몇 가지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들 정체성의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가서 중심지를 폭파하는 것이다.
바리새인,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지만 거짓이다.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다.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은 마음과 연관돼 있다. 바리새인의 정체가 여지없이 폭로된다.
지형은 목사 (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