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배수아 “문학은 언어·상상력의 여행 작품 의도 묻는 건 상투적”
입력 2010-09-24 17:40
소설가 배수아(45)는 긴 생머리에 검정색 무명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검정색 원피스 안에 아무도 훼손할 수 없는 자기만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 했다. 최근 창작집 ‘올빼미의 없음’(창비)을 펴낸 그녀는 지난 11일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 ‘문인의 집’ 주최로 열린 ‘우리 시대 대표 작가와의 만남’에 초청되어 100여명의 독자들을 상대로 강연했다. 근래 들어 언어와 정신에 대한 탐색을 진전시키며 서사가 해체된 단편을 잇달아 발표해 온 터라 그녀가 독자 앞에서 자신의 문학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했다. 인터뷰는 강연을 전후로 이어졌다.
-당신은 왜 문학을 하는가.
“우회적으로 답해볼까요. 예전에는 수능시험을 목적으로 외국어를 배웠다면 요즘은 세계여행을 하기 위해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여행을 하고 싶어 하지요. 그건 자유에 대한 생각의 확장이지요. 문학은 언어의 여행입니다. 언어적 상상력이 없으면 여행이 아무리 자유로워도 그걸 소유할 수는 없을 거예요. 제가 독일에 머물 때 식당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주문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지요. 사람들은 어떻게 음식을 주문할까, 하는 생각에서죠. 모두들 언어는 달랐지만 그건 음식에 대한 주문 이전에 언어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지요.”
-당신의 문장은 소설가의 것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것이라는 말에 동의합니까.
“저처럼 8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작가들은 대개 대화체로 첫 문장을 쓰는 버릇이 있더군요. 그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은 글이라는 매력을 사라지게 한다고 생각해요. 이게 대답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글의 매력이 소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장 하나하나를 소리 내서 천천히 읽으라고 권하고 싶어요. 책을 가장 느리게 읽는 방법은 책을 번역하는 것이지요. 좋은 문장은 번역을 하면서 알게 되지요. (그녀는 재독 시절의 은사였던 독일 문학의 거장 마르틴 발저의 소설 ‘불안의 꽃’을 번역하기도 했다.) 번역을 하다보면 언어 사이에 간극이 느껴지지요. 그 간극을 통해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지요.”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 있다면.
“당신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게 뭐냐는 질문이에요. 이건 다른 작가들도 싫어할 거예요. 그런 질문은 너무도 상투적이지요.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는 ‘의도하지 않는 게 문학’이라는 말을 했지요. 그런데 독자들은 마치 교과서에서 키워드를 뽑아내듯 작품의 의도성을 관습적으로 물어보곤 하지요. 하지만 하나의 소설은 모든 독자들에게 다르게 읽히는 법이죠. 한 문장으로 그걸 알아낸다는 건 비문학적이지요.
-작가가 될 수 있는 조건이 있었다면.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했어요. 학교를 다니기 싫었고 수업과 교과서가 싫었지요. 그래서 교과서를 펼쳐놓고 그 안에 다른 책을 끼워서 읽었는데 그게 너무 행복했지요. 중학교 때에는 그래서 선생님에게 많이 맞았어요. 내가 읽고 있던 책으로 머리를 맞았지요. 그건 책과 세상은 상반된 어떤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었지요. 책은 현실과 다르다는 것. 그건 매우 좋은 경험이 됐지요. 그게 전부였고 난 작가를 꿈꾼 적도 없어요. 그러다 이공계 대학에 진학(이화여대 화학과)했지요. 그래서 작가에의 도전은 매우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난 90년대 초, 컴퓨터가 나왔을 때 워드 연습을 하다가 최초의 단편을 썼어요. 무엇을 쓰자는 게 아니라 머릿속 문장을 옮겨놓고자 했지요. 그걸 문예지에 보냈더니 채택이 됐더군요. (그녀는 1993년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으로 등단했다.) 어떤 측면에서 저는 저 자신을 작가로 수련시킬 기회가 없었지요. 등단할 때는 전업작가가 아니었지요. 2001년에 독일에 가서 마침내 습작을 한 게 작가로서의 제2의 출발이었어요. 몇 개월 후 나는 처음으로 나의 모국어에 대해 생각을 했어요. ‘고향이란 무엇인가’라는 테마가 떠올랐지요. 고향은 전원적이고 향토적인데 서울같은 도시는 도저히 고향이 될 수 없을 것 같았지요. 그러다 ‘고향은 언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고향은 지리적인 개념도 아니지요. 그렇다고 단순히 ‘태어난 곳이 고향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지요. 저에게 고향은 언어지요.
-월요일 독서클럽을 꾸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집에 책은 많은데 읽을 시간이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지요. 그걸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이지만 우리가 70, 80세가 되어서 생계활동이 끝났을 때 그때 본격적으로 읽어보자, 해서 꾸린 독서클럽이지요. 책을 읽는 인간이 되자는 게 모토지요. 해마다 노인들은 늘어나는데 왜 노인들은 책을 읽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출발점이었지요. 독일 체험에 비추자면 그쪽 노인들의 독서율은 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지요. 시각장애인이나 노인들을 위한 오디오북도 활성화되어 있지요. 월요일 독서클럽은 ‘노인이 되어도 책을 읽자’는 취지로 만들어졌어요.”
-요즘 쓰고 있는 작품은.
“고향 상실에 관한 소설이지요. 주인공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지요. 거기에 서울도 등장하고 낮은 언덕과 물에 젖은 들판도 나오는데 그 들판은 논이 아니라 무덤을 의미하지요. 무덤이 내가 생각하는 고향에 관한 뉘앙스지요.”
인제=글·사진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