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정윤희] 밥에 대한 생각
입력 2010-09-23 17:21
풍성한 한가위만큼이나 출판저널 서가에도 풍요로운 책 잔치가 벌어진다. 굳이 달력을 보지 않고서도 들어오는 신간을 통해서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분야별 책 제목만 보아도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고 우리 사회의 이슈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독서의 계절인 9월과 10월에는 소설, 시 그리고 에세이 등 문학 분야의 신간들이 넘쳐난다. 소설가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인기 블로거 로쟈가 쓴 ‘책을 읽을 자유’, 소설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최성각의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등 독서 에세이들은 독서의 계절에 적절하게 출간된 책들이다. 사람은 때가 되면 해야 할 일들이 있듯 책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새로 들어오는 책들의 제목, 책표지 등 면면을 살펴보는 것은 무척 가슴 설레는 일이지만 낯선 곳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는 책과 운명처럼 만나는 일도 더없이 기쁜 일이다. 친구들과 찾아간 북카페 서가에 꽂혀 있는 시집 한 권을 꺼내 들척이다가 이수익 시인이 쓴 ‘밥 보다 더 큰 슬픔’이라는 시와 마주쳤다.
“크나크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 / 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 / 슬픔일랑 잠시 밀쳐두고 밥을 삼켜야 하는 / 저 생(生)의 본능이, / 상주(喪主)에게도, 중환자에게도, 또는 그 가족에게도 / 밥덩이보다도 더 큰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
주문했던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르고 몇 번이고 시를 곱씹었다. 예전에 황지우 시인이 쓴 ‘거룩한 식사’라는 시를 접했을 때 목에 맺힌 응어리를 토해 내지 못하고 끙끙댔던 기억이 났는지 가슴이 시렸다.
“나이 든 남자가 /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 올라오는 것이 있다 // (중략) //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 이 세상 모든 찬밥에 / 붙은 더운 목숨이여 // (중략) // 파고다 공원 / 뒤편 순댓집에서 / 숟가락 가득 국밥을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이수익 시인과 황지우 시인의 밥에 대한 노래처럼 하루 세 끼 챙겨먹는 밥에 대한 숭고함은 생각하면 눈물겨운 일이다. 김훈 소설가가 쓴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산문 제목처럼 밥이 지겨운 대상으로 전락해버리고, 밥으로 우리 욕망을 채우는 일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심하게도 슬픔이 밀려왔었다.
그러나 우리는 낯선 사람들과 친숙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함께 밥을 먹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면 함께 밥을 먹는 일은 빠지지 않는다. 이번 한가위 때도 차례를 지내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아무런 상념 없이 몸안으로 떠 넣는 밥 먹는 의식이 ‘밥 보다 더 큰 슬픔’과 ‘거룩한 식사’로 인해 멈칫했다.
책을 읽으라는 외침이 무심하게 들리는 가을이다. 책으로 밥벌이를 하는 나에게 때론 책보다 밥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이번 가을에는 오래도록 연락을 끊었던 친구를 만나 밥을 먹을 생각이다.
정윤희(출판저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