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句에 실어 보낸 따뜻한 제자 사랑… ‘국어 선생님의 시 배달’
입력 2010-09-23 17:30
국어 선생님의 시 배달/김영찬·박성한·정형근 엮음/창비
경기 안산고 국어 교사인 박성한 선생님이 제자 ‘미서’에게 시 한편을 읽어 줬다.
“아무것도 뿌리 내리지 못할 것만 같던/집채만 한 바윗덩이에/어느 사이엔가 조그마한 금이 가고/금이 간 그 틈바구니에/낙엽이 떨어지고/산비탈 어디선가 바람결에 날아와/흙먼지가 쌓이고/날아가던 이름 모를 산새 용변을 떨어뜨리고/홀로 외롭던 민들레 홀씨 가녀린 새싹을 틔우네”(정세훈의 ‘관심’)
미서는 봄꽃 같은 미소가 예쁘고 활달한 17살 여드름 투성이 소녀다. 하지만 선생님은 미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미소 속에 슬픔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서는 홀어머니와 떨어져 시골 할머니 댁에서 외롭게 자라고 있었던 것. 선생님은 어려운 환경에서 반듯하게 자란 미서가 고마웠다. 그래서 용기를 잃지 말라고 미서를 위해 시를 골라 들려주었다. 시에 덧붙인 글에는 제자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이 묻어있다.
“‘바윗덩이’에 작은 ‘틈’이 생길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그 틈에 ‘민들레 홀씨’가 날아와 ‘새싹’을 틔울 때까지는…. (중략) 교사는 존재의 의미, 세계의 의미를 찾도록 돕는 사람이다. 그것이 ‘관심’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새삼 이 시를 통해 깨닫는다.”
선생님이 읽어준 시 때문일까. 미서의 성적은 이후 쑥쑥 올라 지금은 전교 10등 안에 든다고 한다.
“미서는 또래보다 속이 깊고 훌륭한 아이입니다. 미서가 시를 듣고 감동했다고 하더군요. 자기 푸념에 관심 가져줘서 고맙다고도 하고요.”
평소 시와 아이들을 사랑한 전국의 국어 선생님들이 한데 모여 ‘국어 선생님의 시 배달’을 펴냈다. 지난해 4월부터 ‘창비국어’ 홈페이지와 전자우편을 통해 전하고 있는 시와 글을 모아 단행본으로 엮었다.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 50명이 한 편씩 시를 엄선하고 이를 소개하는 산문을 짤막하게 곁들였다. 학생들이 직접 골라 시인에게, 친구에게, 선생님에게, 부모님에게 사연과 함께 배달한 시도 몇 편 실려 있다.
서울 국제고 2학년 김광흥 군은 나희덕 시인의 ‘뿌리에게’를 어머니에게 배달했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아 나의 사랑을”
암 투병중인 어머니 양영선씨는 이 시를 받고 ‘너는 내 가슴을 뛰게 한다’는 제목의 답글을 아들에게 보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으며 희생하는 사랑을 찾던 아이가, 순환하는 흙의 사랑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중략) 사랑하는 우리 아들, 내가 말했던가? 너는 내 가슴을 뛰게 한다고, 내 삶의 커다란 의미라고, 나를 살게 하는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시를 매개로 들려오는 우리네 이웃들의 순박하고 따뜻한 사연들이 가슴을 울린다.
김상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