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터민 3인의 추석] “北수용소에 갇힌 딸 생각하면 한숨”

입력 2010-09-19 23:34


“추석이면 수용소에 갇혀 있을 딸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

19일 찾아간 서울 신정동 한철(가명·64)씨 집 거실에는 한씨 부부와 자녀 3명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지난해 가족여행을 다녀온 제주도의 초원을 배경으로 다섯 가족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한씨와 아내 김선화(가명·56)씨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북에 두고 온 큰딸 때문이다.

1946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태어난 한씨는 세 살 때 부모를 잃었다. 여관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중국 국민당원증을 받았던 게 화근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원이라는 이유로 한씨 부모의 생명을 앗아갔다. 지린성에 사는 큰아버지가 고아가 된 한씨 형제를 거뒀다. 한씨는 친형이 전염병 때문에 숨진 뒤 북한에 가면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씨는 17세 되던 63년 함북 회령으로 들어갔고 40여년을 회령에서 보냈다.

손재주가 많았던 한씨는 북한에서 기계 수리공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큰 욕심 없이 살던 한씨 가족은 90년대 말 기근을 피하지 못했다. 배고픔을 견딜 수 없었던 한씨는 2004년부터 자녀들을 차례로 중국으로 보냈다.

중국에 도착한 자녀 4명 중 3명은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큰딸 영희(가명·36)씨에게는 불행이 닥쳤다. 2005년 봄 중국에서 몽골 국경으로 넘어가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된 것이다. 한씨는 그해 6∼12월 매일 딸이 갇힌 회령수용소에 밥을 날랐다. 하지만 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12월 한씨 부부는 자녀들이 탈북했다는 이유로 함남 허청군으로 추방됐다. 한씨는 추방지인 허청에서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딸이 김정일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 회령을 떠났다는 소식뿐이었다.

2008년 12월 한씨 부부는 큰딸을 북에 남겨둔 채 한국으로 왔다. 2년 전 도착해 한국에 자리 잡은 자녀들이 한씨 부부를 극진히 모셨다. 사업수완이 좋은 한씨는 한국에서 휴대전화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생활이 자리를 잡을수록 큰딸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은 더 커졌다. 한씨는 지난 6월 협심증으로 심장 수술을 받았고 아내 김씨는 두통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한씨는 “좋은 세상에 와서 따뜻한 밥을 먹을 때마다 북에 남겨 놓은 영희가 떠올라 가슴이 무너진다”며 “죽기 전에 영희와 함께 추석을 보내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글 사진=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