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을 왜 고생시켜? 우리가 서울 가면 되제”

입력 2010-09-19 21:36


“뭐 할라고 길바닥에 돈뿌리고 열 몇 시간씩 고생하며 내려와? 영감하고 우리 둘이서 올라가면 되제.”

금슬 좋기로 소문난 전북 순창군 팔덕면 장안리의 김경자(64) 할머니와 최병정(74) 할아버지. 3년 전 구순 노모가 돌아가시면서 부부는 명절이면 서울로 온다. 부모가 2남 3녀 자식들이 사는 도시로 역귀성하고, 자녀들은 대신 부모의 생신과 여름휴가 때 고향을 찾는다.

“우리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모두 너무 착해. 올 여름에도 아들딸 식구들과 완도랑 여수랑 두루 다니면서 구경했어. 부모들이 잘 하니까 손주들도 배워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너무 잘해.” 김 할머니의 자식자랑은 끝이 없다.

김 할머니는 18세에 순창에서도 산골마을인 이곳으로 시집 와 반평생을 억척스럽게 헤쳐 왔다. 농사일 외에 화장품 외판원, 노점상, 구멍가게 등 안 해 본 일이 없다.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고 키운 것이 못내 미안하다.

근래엔 이곳 도라지농사가 친환경농산물로 전국에 소문이 나면서 주민 소득도 제법 높아졌다. 김 할머니 역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밤새 도라지를 까서 서울 경동시장까지 가지고 올라가 좋은 가격에 팔았다. 덕분에 부부는 집도 장만하고 논과 밭도 남들만큼은 마련했다. 지금은 굳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지만, 자식들에게 쌀과 고춧가루, 마늘, 참기름, 들기름 등 손수 지은 먹거리를 나눠주는 재미에 힘들어도 그만둘 생각은 없다. 며칠 전 추석 대목장에 다녀오면서 아들, 딸, 며느리, 사위 몫으로 조그마한 명절선물도 준비하고 손주들에게 줄 용돈도 새것으로 바꿔 놓았다.

저녁상을 물리고 서울에 갖고 갈 짐도 야무지게 꾸려 놓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김 할머니는 아이처럼 설레기만 한다. 창밖에는 한가위 보름달이 시골집 앞마당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김 할머니는 혼잣말로 소망을 되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올 한가위만 같아라. 자손들 모두 화목하게 잘 살고 내년 한가위에도 영감 손 잡고 오순도순 서울 나들이 가게 해주세요!”

순창=사진·글 곽경근 기자 kkkwa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