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미술史 드로잉으로 말한다… ‘한국드로잉 30년:1970∼2000’ 전
입력 2010-09-19 17:23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렬 화백이 1960년대 말 그린 드로잉은 현재 작품이 완성되기 이전 단계를 보여준다. 물방울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지 창작 모티브를 살펴볼 수 있다. ‘아토마우스’로 잘 알려진 작가 이동기의 1993년 드로잉은 10년 넘게 작품 주인공으로 자리잡은 아토마우스 캐릭터의 변화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2006년 국내 최초의 드로잉센터를 개관하는 등 드로잉에 관심을 보여온 서울 방이동 소마미술관이 11월 21일까지 ‘한국드로잉 30년:1970∼2000’ 전을 마련했다. 2008년 같은 곳에서 열렸던 ‘한국 드로잉 백년전 1870∼1970’의 2부격 전시로, 국내 작가 70여명의 작품 300여점으로 꾸며지는 국내 최대 규모의 드로잉 전시다.
1970년대 이후 30년간 한국현대미술의 발자취를 드로잉을 통해 살펴보겠다는 취지로 마련한 이번 전시는 관객들에겐 ‘드로잉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종이에 연필로 그린 스케치 개념의 드로잉이 대부분이지만 회화나 사진, 오브제까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드로잉의 범주를 벗어나는 작품들이 상당수 눈에 띈다.
연대기순으로 6개 테마로 꾸며진 전시는 70년대 실험미술 세대의 드로잉으로 시작된다. 백남준의 ‘실험 TV’는 관객이 마이크 앞에 서서 소리를 내면 브라운관 화면 속 파장이 변하는 작품으로, 파장을 드로잉한다. 2전시실에서는 미니멀한 회화를 닮은 이강소의 ‘무제’, 쇠사슬을 캔버스에 묶은 하종현의 ‘접합’ 등 추상적인 드로잉들이 선보인다.
3전시실은 사회상을 반영하는 작품들로 꾸며졌다. 이종구가 1983년 동산고 교사 시절 받은 월급봉투를 누런 종이 위에 크게 확대해 그린 그림이나 조정래의 대하소설 ‘한강’의 삽화로 그린 드로잉에서는 당시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제주 4·3 항쟁을 소재로 한 강요배의 1989년 드로잉과 오윤 이철수 박재동의 작품도 시대상을 담고 있다.
4·5·6전시실에는 요즘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의 드로잉이 전시된다. 2005년 15량의 열차를 흰 천으로 덮어 미국 뉴욕에서 LA까지 횡단했던 전수천의 ‘무빙 드로잉 프로젝트’ 사진은 열차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에 흰 선을 만드는 ‘움직이는 드로잉’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보여준다. 황주리 설원기 오원배 김호득 등의 자화상도 이채롭다.
현대중공업의 제1호 선박 ‘아틀란틱 바론’의 설계도면과 올림픽공원 평화의문, 역도경기장 설계도도 전시장에 걸렸다. 미술품은 아니지만 한국 현대사를 담아낸 드로잉이라는 점이 반영됐다. 전시를 기획한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작가가 작품을 구현할 때 가장 먼저 나오고 생각의 변화를 보여주는 날것의 의미로 드로잉의 개념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미술관 측은 이번에 출품된 작품의 절반 정도는 그동안 한 번도 전시를 위한 패널로 만들어진 적이 없는 미공개작이라고 소개했다. 이성순 명예관장은 “서울과 광주, 부산에서 국제비엔날레가 동시에 열려 해외 미술인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한국미술의 뿌리를 보여주고자 한다”고 설명했다(02-425-1077).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