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71)

입력 2010-09-19 14:58

당신은 가을입니다

귀뚜라미 날개 부딪히는 소리가 밤을 지새웁니다. 밤새 저러다가 하늘로 비상할 수만 있다면 좀 좋겠어요? 그게 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귀뚜라미가 운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가을의 빛깔은 청색입니다. 어둠조차 청색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곧잘 바이올렛이라거나 코발트 또는 턱하고 숨 막히는 깊은 호수 같다고들 하지만, 가을 하늘 빛을 ‘자극하는 無’라고 했다는 괴테의 표현이 나는 가장 마음에 듭니다. 적색이나 황색은 능동적인 색채잖아요. 뭔가 흥분케 하는 과격한 빛깔이죠. 그죠? 그러나 청색이나 바이올렛 빛은 수동적이고 싸늘하고 외롭습니다. 뭔가 있을 듯하면서,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뭐 그런 색이니 ‘자극하는 無’가 맞죠. 그래서 더욱 귀뚜라미의 날개 부딪히는 소리가 슬프게 들리는 거예요.

가을빛은, 가을의 소리는 청색이에요. 자극과 정지라는 모순하는 양면성을 함께 통일시켜 버린 모순의 색. 괴테의 말대로 푸른 가을빛은, 가을 소리는 정지(無)의 의식입니다. 그늘과 어둠과 침묵으로 흐느끼는 영혼의 색채입니다. 죽음 속의 생명, 침묵 속의 요설(饒舌), 모순의 소리, 자극하는 무의 빛 맞습니다. 그러나 결코 어두운 빛깔은 아니죠. 푸르른 채로 내부로 젖어 들어가 깊이를 얻은 색채라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영원과 무한, 무의 빛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가을 소리들은, 나타나면서 숨어 있고, 즐거운 듯하면서, 슬프디 슬픈 신비한 색이에요.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사 18:4)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